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욜수기 yollsugi Apr 30. 2020

늦게 알게 된 연필의 매력

욜수기의 짧은 호흡 #7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가장 먼저 잡게 되는 필기구는 높은 확률로 연필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연필만 쓰라고 했을 때는 샤프가 쓰고 싶었다.
제도샤프부터 높은 가격대의 일제샤프들까지, 그 뭔가 메탈릭한 느낌이 멋져보였다.

샤프를 쓰다보니 중고등학교 때는 볼펜이 쓰고 싶었다.
샤프나 연필처럼 쉽게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것이,
한 번 쓸 때 강단있게 써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져 강해보였달까.
뭐, 사실 다 떠나서 대학생 형, 누나들이 쓰는게 멋있어보여서 쓰고 싶었던 거겠지.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지겹게 볼펜을 썼다.
특히나 수험 생활 중에는 필기구가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냥 손에 집히는 대로 썼을 뿐이다.
그나마 고른다면, 펜 잉크가 닳는 과정이 보이는 볼펜을 선호했다.
다 쓴 볼펜은 박스 하나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다 쓴 볼펜들이 쌓여가는 과정을 즐겼다.
이제 더 이상 볼펜이 멋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작년부터인가, 다시 연필을 꺼내들었다.
확실히 연필깎이에 빙빙 돌려가면서 깎는 멋이 있다.
연필이 줄어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펜처럼 뚜렷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샤프처럼 메탈릭한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언가 희미하면서 ‘미완성’을 써내려가는 느낌이 참 좋다.
생각에 잠길 때면, 손에 힘을 풀고 슥슥거리며 아무 의미없는 선을 계속 덧칠하는 느낌도 좋다.
볼펜을 쓰면서 잊고 있던 ‘덧칠’의 맛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거나 에디터로서 기고작업을 할 때는 당연히 키보드를 이용한다.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막 떠오를 때 그 속도에 뒤쳐지지 않게 받아적기에는 키보드만한 것이 없다.
손으로 적다가 까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다 쓴 글을 퇴고할 때, 혹은 책을 읽다가 인사이트 가득한 문단을 발견했을 때는
연필을 꺼내든다. 그리고는 연필로 한 자 한 자 차근차근 써내려간다.
사각거리면서 써지는 느린 아날로그함이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의 무게, 생각의 무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