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욜수기 yollsugi Aug 03. 2021

핑계대기 시작하면 같은 상황에서 또 집니다

이제 하반기 시작. 스토브리그 백승수 단장의 어록들을 기억할 타이밍

상반기를 정신없이 달렸다. 5월에는 "뭐야, 거의 한 2년 보낸 줄 알았는데 아직 반년도 안 지났네?" 하는 마음이었는데 눈 뜨고보니 7월이 되었다. 새삼 '시간이 가는 것'의 체감 속도가 얼마나 왔다갔다 변동이 심한지 다시 한 번 느끼는 요즘이다. "회고해야지... 회고해야지...", 하면서 7월이 벌써 다 지나간 것만 해도 나에게는 사뭇 철렁 하는 요인이 된다. 

그만큼 어떻게 보면 바쁘게, 어떻게 보면 조급하게 달려온 6개월이었다.


7월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무슨 일을 어떤 환경에서 하고 싶을까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꼭 필요했던 과정이었지만 명시적인 기록으로 남은 것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한번씩 조급함이 몰려오기도 했다.

아마 지금의 기간은 6개월간 부스트를 밟은 뒤 급정거하면서 생긴 스키드마크 정도가 아닐까.

스키드마크 이미지엔 역시 차 대신 르브론 제임스가 경기 중에 달리다 코트에 내버린 마크 아니겠나.

상반기는 나에게 의미가 남달랐다. (글쎄, 작년 하반기가 끝나고 연말에도 이 말을 했던 것 같긴 한데

지난 1년간 굉장히 많은 변화들을 겪으며 밀도 있게 달려왔기 때문에, 그만큼 남은 21년의 6개월, 하반기도 '정말 잘'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상반기에 과분한 기회를 얻었다. 경력으로 치면 주니어, 아니 신입에 가까운데 플랫폼 기획 PO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기회가 온 이상 마다할 이유도 없었고, 권한과 책임 때문에 쫄아있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나만 잘하면 되겠다. 모르는 건 공부해가며 하면 되겠다. 다만 팀과 프로덕트에 해가 되지 않게, 나의 부족함을 메꾸는 시간은 최대한 컴팩트하게 진행해야 겠다." 

이 생각과 함께 올 2월, 새로운 시작의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나, 예상했던 것보다는 이른 시점에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회사를 나오게 된 이유는 확실하다. 돈, 복지, 조직문화, 성장성, 안정성, 회사의 이름값, 도메인, 이 7가지를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세워볼 때, 나는 항상 성장성이 가장 위, 안정성이 가장 아래였다. 회사의 성장도, 나 개인의 성장에도 한계를 느꼈다, 아니 확신하게 되었다. 혹자는 고작 5개월로 무엇을 알 수 있냐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길이에 앞서는 밀도의 힘을 믿는다. 일을 하고 돈을 벌기보다 문제를 찾았고 문제를 해결했던 기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족한 점도 많이 느끼고, 메꾸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보완했던 약점이 있는가 하면, 건들지도 못했던 약점도 있었다.


스토브리그라는 드라마를 정말 재미있게 봤었다. 스토리도 스토리이지만, 남궁민 씨가 연기한 백승수 단장이 하는 말들 중에 워낙 기억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서, 종영 후에 클립으로라도 가끔씩 계속 돌려보는 드라마가 되었다. 현실에서 재정비의 시간을 맞이하니, 그 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모두가 같은 환경일 수 없고 각자 가지고 있는 무기 가지고 싸우는 건데 핑계 대기 시작하면 같은 상황에서 또 집니다.

스토브리그 드라마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대사였다. 후회없는 선택이라는 것은 곧 선택에 따른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수하는 것이고, 핑계대지 않는 자세가 전제 조건이다. 2월 처음 그 자리에서 시작했을 때와 지금의 상태가 다른 것은 결국 내가 준비가 덜 되어있기 때문이고,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더 설득력을 갖출 수 있어야 했고, 프로덕트에 대해서도 식견이 더 쌓여있어야 했다고 본다. 부족함 때문이라 해도 그것이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부족함을 메꾸어나가는 것이 지금부터의 일이니까. 그리고 많은 회사의 장점들을 뒤로 하고 나온 것도 내 결단 아니었나. 5개월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5개월 동안, 일의 진척은 예상보다 되지 않아 아쉬웠으나, 내 성장의 정도는 충분히 만족한다. 앞으로를 예상해볼 때 지난 5개월과 비슷한 정도로 성장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에 확신이 들어 나오게 된 것이다. 다만 다음에도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내 문제일 것이다.


대개 첫 회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앞으로의 커리어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를 지닌 첫 회사가 산술적으로 '첫 번째 회사'여야 하냐 라고 묻는다면 동의하지 않는다. (그게 내 마음이 편해서일 수도 있다.) 온전히 내 에너지를 100% 다 하면서, 주니어로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다고 여겨지던 두 회사를 미련 없이 그만둔 21년 상반기였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두 번이나, '아쉽고 죄송한 마음을 안고, 그만두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한 나였기에 "이제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회사를 빨리 찾아야 하는데" 라는 조급함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이번 하반기가 중요하게 다가왔다. 


6월에 그 마음을 안고, 이 곳 저 곳 지원을 했었다. 서류에서 떨어진 곳도, 채용과제를 하다가 떨어진 곳도, 면접에서 떨어진 곳도, 합격한 곳도 있었다. 조급함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올 2월의 목표가 '권한과 책임을 많이 부여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면, 이 다음 목표는 '오래 다닐 수 있는, 회사와 내가 함께 성장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7월에는 의도적으로 채용지원을 멈추고 스스로를 딥다이브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에 대해서 더 깊게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해왔던 것들은 하면서 안 했던 것들을 할 겁니다.


스토브리그에서 백승수 단장이 첫 구단 전체 회식 때 담담하게 남긴 말이었다. 이 말이 너무도 멋지게 다가왔다. 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고 느끼면 잘라내겠다고 말하는데, 그 짧은 말이 얼마나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이 감명 깊었던 걸까. 실제로 상반기에 일을 하면서 업무상 큰 변화가 필요하다 느껴지는 요소들이 여럿 있었다. 고착화된 것에 맞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이를 추진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히 필요한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고, 백승수 단장의 이 대사 한 마디가 계속 떠올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해왔던 것들은 하고.. 안 했던 것들을 하는 PO가 되겠다.. 변화의 포인트를 잘 캐치하고 개선이 필요한 순간에 선택을 주저하지 않겠다..' 끊임없이 되뇌인 말들이었다. 

그러고보니 백승수 단장은 '문제 정의'와 '개선'에 도가 튼 인물이었다. 구단 차원의 조직적인 측면에서도, 본인 스스로에 대한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말이다. 선택에 책임지는 자세, 문제 정의와 개선에 필요한 태도, 그리고 백승수 단장에게서 배운 세번째 인사이트는 '부족함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세'다.

남들이 비웃는게 무서워서 책으로도 안 배우면 누가 저한테 알려줍니까?
그럼 사람들이 알려줄 때까지 기다릴까요? 1년 뒤에도 야구를 모르는 게 진짜 창피한 것 아닙니까?

나의 약점,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 내가 갖추지 못한 역량, 나의 미숙한 점. 모두 드러내기 어려운 점들이다. 채용 인터뷰 때 이에 대해 물어보겠지 하며 열심히 고민해도, 막상 인터뷰 때 내 부족한 점을 드러내야 하는 타이밍이 오면 덮고 포장하기 급급했다. 이를 테면 '제가 아직 프로덕트 한 사이클을 다 돌려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사이드 프로젝트와 스스로 프로덕트 공부를 함을 통해 이를 보완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런 류의 멘트였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내게 귀인과도 같았던) PM리드 분과의 일화가 하나 더 떠오른다. 내 경험과 역량에 대해 대화를 한참 주고받던 중 그 분이 여쭤보셨다.

"수현님 제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시겠어요? 제가 수현님께 지금 가장 우려하고 있는 포인트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아무래도 제가 강점으로 어필하고 있는 요소들이 과연 진짜일까에 대해 의구심이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PO로서 린하게 추진하고 실행하고, 고객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든 팀과의 퍼포먼스 개선을 위해서든, 프로덕트에 대해 고민하는 차원에서든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허슬 마인드를 많이 이야기했었는데요. 아무래도 소프트 스킬이니만큼 과연 진짜 그럴까? 입증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실 것 같습니다.
입증.. 입증이라.. 입증.. 자 수현님 그냥 지금까지 이야기 신경쓰지 마시고, 한번 새로 시작해보죠. 저한테 아직 수현님 이야기 해줄게 많을 것 같은데, 역량, 직무 이런거 상관없이 수현님 스토리를 한번 들려주시겠어요?

이후 20여분 정도를 계속 말했다. 말하는 동안 편해지고 솔직해지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스토리를 쭉 읊은 후에 그 분이 말했다. 이제야 내가 이력서에 써놓은 내용과 앞선 대화에서의 답변들을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고. 부족함과 실패의 경험들을 포장하지 않고, 다 드러내고 나서야 '인터뷰는 곧 대화다'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부족함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솔직하게 스스로 마주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채용 인터뷰에서만 보아도 단 몇 문장으로 나의 부족한 점들을 전달하기도 어려운데, 그 와중에 포장까지 시도한다. 급급한 포장보다는 오히려 확실하게 스스로 인지한 부족한 점을 잘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아니, 효과적이기보다 더 어렵고 가치있는 미션일 수도. 채용 인터뷰 뿐만일까? 과연 나는 나의 부족함을 개선하기 위해 얼마나 깊게 파보았는가. 나 스스로를 개선시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어떻게 포장할까' 하며 남의 시선만을 의식하지는 않았는가. 부족한 점의 개선은 이를 포장 없이 당당하게 오픈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족함을 메꾸기 위한 배움도 그 이후에 시작된다. 7월 한 달 간, 스스로의 부족함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진 뒤에 생각보다 당당하지 못한 점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더 깊게 파면 팔수록 초연해지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발전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오늘 글 역시 내 부족함 중 하나를 오픈하는 과정이다. 하나씩 드러내고, 하나씩 배운다. 모두가 내 부족한 점을 다 알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드러내고 공유하고 배워나가겠다. 

신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