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붉은 장미꽃비가 내려야 해요'
《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
오랜만에 춘천을 다녀왔다.
먼길 운전을 했더니 허기가 져 일단 눈앞에 보이는 국밥집으로 문을 열었다.
”국밥 한그릇 주세요!“
손님이 나만 있어 그런지 주문한 내 목소리가 가게를 안에 울려퍼지는 듯 했다.
허름한 주방에서 구수한 머릿고기 삶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니 앞으로 나 올 국밥이 꽤 기대가 되었다. 먼저 나온 상차림엔 김치와 깍뚜기가 1인분이 아닌 3인분 정도로 꽤 양이 많았다.
곧바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뚝배기가 눈 앞에 도착했다.
”맛있겠다“라는 탄식과 함께 인증샷으로 국밥을 핸드폰에 정성스레 담아주는 음식에 대한 예의는 센스이다.
들깨가루를 국밥에 가득 부어 휘휘 저어 수저에 국물을 조금 담아 입술에 갖다대었다.
”이 맛이야“ 계속 끝없는 감탄사를 연발하니 할머니 사장님이 나를 보며 웃는다.
”그렇게 맛있어? 더 줄까?“
이렇게 푸짐한 국밥에 더 주신다는 인심에 한번더 감동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충분합니다“
요즘 6천원에 이렇게 푸짐한 순대국을 먹을 수 있을까?
우연히 들린 춘천역 부근 어느 외진곳의 순대국집은 어저면 우연히 들린 곳이 아닐수 있다.
배고픈 학생시절 이 곳을 지나며 국밥을 먹었던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지역 주변 순대국밥집이 이 집 말고도 몇 군대 아니 꽤 많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집이 아닌 사라진 옆집가게의 국밥집에서 배고품을 잊었는지 모른다.
물론 가격은 조금 올랐으나 돼지머리와 순대, 부추가 여전히 푸짐했다.
할머니 사장님의 주름사이로 춘천에서 아버지를 따라 국밥을 먹던 시절이 떠올랐다.
유난히 돼지머리 비계가 가득했던 시장골목의 국밥집 향기가 이 집안에도 가득 베어 있다.
"사장님, 지금도 여기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할머니 사장님은 휜 허리를 짚고 내 앞에 섰다.
"총각같은 사람들이 많이오지."
나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국밥 좋아하는 총각이 많이 왔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남기려했던 김치와 조금 남긴 밥도 싹싹 긁어 먹었다.
가게 문을 나오려하자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성이 가게 문을 들어섰다.
"순대국 하나 주세요" 그는 조금전 내모습 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이 집은 할머니 말대로 총각 한사람씩 들어오는 가게였나보다란 생각이 들었다.
춘천은 예전과 달리 이것저것 많이 변했다.
지하철이 서울과 연결되고 사람도 부쩍 많아졌으며 옛날식 가옥은 서서히 사라지고 높게 들어선 빌딩이 가득이나 좁은 땅을 촘촘히 매워 놓고 있다. 이제 중도에 레고랜드까지 개장하니 춘천은
내가 살았던 시골적 정취의 낭만이 있는 강원도란 이미지 보다 경기도 이미지에 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동창친구들과 추억의 장소를 맴돌다보니 무릇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소양강 다리 건너편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닭갈비 냄새, 짝사랑했던 여학생이 버스를 기다리던 멈춰버린 정류장, 자주가던 돼지머리 국밥집 아주머니의 깊게 패인 주름도 내가 연실 뿜어내는 감탄사를 아마 당해내지 못할지 모른다.
늦은 오후 나의 발걸음은 모교인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학교건물을 바라보며 느낀 설레임과 함께 어느새 교실 안 창가쪽 앞 빈자리에 멈춰섰다.
똑같은 공간, 땀냄새, 창밖으로 보이는 오래된 아파트 풍경들이 동공 속에 사로잡혔다.
'지금 실컷 놀아 그깟 공부 아무것도 아니야’
창밖을 바라보며 볼펜을 빙그르 돌리고 있는 나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얹으며 말했다.
그런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뒤를 돌아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엄지를 척 하고 들어올렸다.
교실 뒷 편 어지간히 요란스러운 녀석들의 수다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교실과 작별인사 후 학교 앞 분식집으로 향했다.
밀가루 반죽하시는 분식집 사장님의 뒷 모습은 변함없고 정겹기만했다.
"사장님 저 왔어요!"
사장님은 반죽을 멈추고 뒤를 돌아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시며 "누구지?"라며 고개를 저으셨다.
순간 모자를 벗어던지고 "접니다. 정법이요"
사장님은 반짝이는 나의 민머리를 보고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시며 반죽하던 손을 털어내며 말했다. "늙어서 눈이 잘 안보여 못알아 봤어, 자넨 얼굴이 여전하구만“
사장님과 눈웃음 인사를 몇 번더 나눈뒤 분식집의 만두를 정량보다 많이 주문했다.
“이렇게 많이 먹을 수 있겠나?”사장님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물론이죠, 오랜만에 왔으니 못왔던 세월 만큼만이라도 많이 먹어둬야죠”
만두튀김을 후딱 해치우고 사장님께 다가갔다.
"사장님! 저 다시 강릉으로 떠나요? 튀김만두 2만원어치 포장해주세요"
사장님은 정성스레 튀김만두를 건네받으며 현금 2만원을 냈으나 다시 만원을 돌려주며
말했다. “먼 길 가는데 휴게소라도 들려 커피라도 사드시게”
필사적으로 사양하며 돌려주려 애썼으나 사장님은 결국 내 자켓주머니에 만원을 꼿아 넣어주셨다.
이 날 영동고속도로는 평소보다 긴 정체로 인해 시간이 더 걸렸다.
여행의 피로가 쌓였는지 눈이 침침해지고 평소보다 하품이 잦아졌다.
그때였을까 춘천 친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덕분에 잘 도착했어”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친구는 “뭐 두고 간것없어?”라고 말했다.
내 시선은 조금전 들고 올라온 무거운 캐리어와 만두봉지로 향한 뒤 식탁 위에 던져진
지갑을 보며 안도하며 대답했다. “두고온건 없는데”
친구는 곰곰이 생각해보라 재촉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두고온 것은 없어 보였다.
그때 친구는 내게 사진한장을 보낸 뒤 말했다.
“그렇게 열심히 추억을 담는다며 사진을 찍더니 카메라만 두고가냐?”
친구가 보낸 사진을 가만보니 내가 가장 아끼는 ‘소니카메라’를 춘천에 두고 온 것이었다.
한번도 잃어버린 적 없던 카메라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추억은 그 장소에 있을 때 가장 빛나기 때문에 잠시 두고 온거니까 걱정마”
라고 친구에게 말을 전했다.
“카메라가 널 그렇게 찾더라..추억은 잃어버리는거 아니라고”
우리는 카메라를 앞에 둔 채 또 한번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