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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은 작가 May 23. 2016

척하며 산다는 것에 대하여

착한다는 건 가장 욕심이 많은 단어이다.

 얼마 전 발가락 골절로 깁스를 한 아들 덕에 연차를 내고 아들과 병원 진료를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다녀왔다. 요즘은 학교에서 구강검진, 건강검진 등 지역 병원과 연계해서 꼭 부모가 데리고 다녀오게 한다. 내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 예방접종도 놓아주고 웬만한 검진은 다 해줬었는데, 갈수록 부모의 참여를 학교가 더 많이 요구한다. 회사에 눈치는 보였지만 한 낮에 아들과 병원을 다니는 기분은 날씨 좋은 봄날의 데이트와 같았다.    

치과에서도 진료 순서를 기다렸고, 정형외과에서도 진료 순서를 기다리다 보니 자연스레 아들과 이야기를 할 시간이 많이 주어졌다. 이 녀석은 틈만 나면 내 손에 있는 나의 스마트한 폰에 관심을 뒀지만, 회사에서 연락이 올지 몰라서 엄마가 쥐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와의 눈 맞춤 대신 내 폰과 눈 맞춤하며 건성으로 내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던 중 아들이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해주는데, 내가 “우리 아들 착하네~”

라고 말한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아들에게 “착하다는 말 취소야~”했더니 왜 그러냐고 아들이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그동안 종교와 가풍을 내세워가며 "착함"을 강조했으니 아들은 내가 말한 “착함 취소”라는 말에 놀라워할 만했다.

 “아들! 착한 기본이야. 그런데 착하다는 말을 해서 너를 착함이라는 칭찬 속에 가두고 싶지 않고 그냥 기본을 다 하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해주고 싶어서 그래~”라고 했더니 아들이 “엄마답지 않아.”라고 대꾸했다.

   

그렇다. 초등학생 아들도 알만큼 나는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예를 든다면 내가 친정엄마에게 배운 대로 아이들에게 “얘들아,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서는 우리 어디 갔다고 말하지 마~” 혹은 “얘들아, 이번에 외갓집에 간 거는 비밀이야.”를 지금까지 가르쳐오며 이것이 예의요, 시어른들을 향한 배려라고 포장했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아들도 갑자기 달라진 나의 가정교육(?)과 가치관에 낯섦을 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릴 때부터 “착하네~”, “착하지?”, “착해야 잘 산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러다 보니 눈치 아닌 눈치를 보는 상황이 간혹 발생했었다. 당연히 결혼해서는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봤었고, 우리 친정엄마처럼 시댁에서는 친정과 관련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착하다”의 정의에 맞추어 살려는 내 자아는 극도의 예의바름을 보여 왔고, 상하관계에 경직된 태도를 보여 왔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이 내게 경직된 태도를 보이기 시작을 했는데, 엄마 입장에서 조금씩 섭섭해지기 시작했다. 굳이 저렇게까지 내 착하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왜 그간 내가 모셨던 상사나 심지어 친정엄마까지도 나를 불편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속 사람은 솔직함과 당당함을 표현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런 모습들이 주위를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착함"이라는 단어에 나를 가두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20대 때는 통금시간 저녁 8시를 지켰고, 공식적인 여행이 아니고서는 단 한 번도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잠을 잔적도 없었다. 이런 생활을 우리는 "착하다"고 표현했다. 도대체 무엇이 착하단 말인가? "착하다"의 사전적 표현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상냥하다’이다. 저녁 8시면 집에 돌아오는 것을 착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외박하지 않고 잠은 꼭 집에서 자는 것이 "착함"이 맞는가? 마흔이 된 지금은 그 "착함"이 부모님의 기대치였고, 현재는 내 자식들에 대한 잣대임을 알게 되었다. 착한 척하며 사는 것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아닐까?

시댁에서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착한 척하며 살다 보니 척하며 행동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평가를 냉혹하게 내놓았다. 남들 평가하라고 착하게 살라고 한 것이 아닐 텐데, 착하게 살라는 건 타인에 대한 착함의 심사기준까지 갖추게 하니 하나를 하게 해서 둘을 하게 하는 대단히 경제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될 단어가 착함이 아닐까?

초등학생 아들에게 이왕 어색한 가치관을 들킨 만큼 앞으로는 착한 척이 아니라 이해하는 척하며 살아보려 한다.


착하다는 건 내가 착한 만큼 남도 착하길 요구하는 욕심쟁이 단어이며, 이해한다는 건 내가 이해하는 만큼 내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단어가 아닐까 싶다.    


척하며 산다는 것이라... 긍정의 단어 속에 어마어마한 욕심이 숨어있는 것이 착함이라면

나는 차라리 이해한다는 적당히 회색적인 단어로 내 교육관의 가치를 새로 세워보겠다.


그리고 아이들도 착하면서 속 좁은 평가 쟁이가 아니라 이해하며 속 넓은 관용 쟁이가 되길 응원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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