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아의 행복편지
희찬이를 처음 만난 건 놀이터에서 아이와 비눗방울을 가지고 놀던 어느 날이었다.
비눗방울 총의 비눗물을 빌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던 희찬이. 본인 친구를 공격해야 하는데 비눗물이 떨어졌다고 했다.
“제발요, 아저씨 제발요.”
우리가 거절하면 희찬이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러나 우리 역시 수중에 가진 비눗물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왜 더 비눗방울을 만들지 않느냐고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는 (계속 만들지 않으면 곧 깡패로 변할) 아이가 옆에 있었다. 희찬이는 전략을 바꿨다. 우리 아이에게 다가와 놀아준다는 명목으로 우리의 비눗방울 총을 쓰는 것. 우리 아이는 어리둥절했고 희찬이는 만족했다. 희찬이는 요구도 잘했지만, 태세 전환도 잘했다.
놀이터에서 정말 많은 초등학생을 만난다. 어떤 아이들은 아기를 좋아한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많다. 또 다른 아이들은 아기와 놀아주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몰두하는 모습에 놀란다. 말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 아이들 모두 제각각 귀엽고 재미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유달리 희찬이가 좀 귀찮았다.
왜일까. 내가 아는 세 명의 초등학생과 많이 닮았기 때문일까.
때는 바야흐로 2010년.
(쓰면서 놀라버렸다. 지금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있겠구나. 어머나 미쳤어)
나는 대림역 근처 영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무 보조, 영어 교재 타이핑, 시급 5천 원으로 알고 간 아르바이트. 나는 거기서 (예상과는 다르게)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쳤고, (심지어) 중학생 과외도 했다. 그리고 내가 받은 보상은 500원 인상.
아무튼 나는 그중에서도 테니스 선수 셋을 주로 가르쳤다. 느껴지지 않나. 그렇다. 그 아이들은 숙제도, 예습도, 복습도, 정확히는 수업에 관심 없다. 그저 매일 더 까맣게 탄 모습으로 학원에 온다. 그리곤 나에게 수업과 전혀 상관없고, 일일이 대꾸해주다가는 원장님에게 눈총받을 만한 질문만 잔뜩 한다. 기본적으로 거침없지만, 자신에게 불리하면 갑자기 저자세로 돌변하던 기억이 난다. 그 점이....희찬이와 닮았나.
그래도 삼총사는 테니스 얘기를 할 때면 좀 달랐다. 까만 피부에 대비되는 흰 눈이 더 번쩍. 테니스에 대해 좋은 얘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들은 테니스를 잘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테니스를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희찬이도 운동선수다. 그는 야구를 한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어? 안양천에 어린이 야구장 있잖아.”
희찬이는 어떻게 그걸 알았냐고, 자신의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킨 양
“아줌마 어떻게 알아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당황했다. 야구장은 너무 떡하니 있었는데... 그 이후엔 주로 남편이 희찬이와 이야기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희찬이가 조금 귀찮았기 때문에 한 발 떨어져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남편이 물었다.
“포지션이 뭐야?”
희찬이는 대답했다.
“2루수요.”
남편이 (의외라는 듯 놀라며) 말했다.
“그거 수비 잘하는 선수들이 하는 건데.”
희찬이의 다음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잘한다고 했던가. 잘하고 싶다고 했던가. 그런데 분명한 건도대체 맥락을 알 수 없이 촐싹거리며 우리를 귀찮게 하던 희찬이도, 야구 얘기할 때만큼은 왠지 목소리가 좀 가라앉았다. 테니스 삼총사에게 테니스란 힘들지만 재미있는 거였는데, 희찬이에게 야구는 뭐였을까. 가라앉은 목소리에 힌트가 있을 것이다.
코치님이 달리기만 시킨다고 했는데 요즘도 달리기 열심히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게 궁금해 대화를 붙였다가는 나도 남편도 우리 아이도 꼼짝없이30분은 넘게 붙들려 있어야 한다. 안타까운 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희찬이를 조금 귀찮아한다. 그러나 희찬이는 우리 식구를 만나면 멀리서부터 뛰어온다. 나는 그런 희찬이가 두렵다. 막상 희찬이가 우리에게 인사 하고 사라지면 웃을 거면서. 희찬이가 가고 나서도 한참을 희찬이에 대해 이야기할 거면서.
아, 희찬이 이야기가 행복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오늘은 이야기가 너무 길었으니 이만 마쳐야겠다.
2022년 7월 26일 화요일
행복편지 지기
박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