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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영 Dec 28. 2018

우리들의 골목길, 라앵

세 번째 잔

<Urban memory_Cheongju>, 라앵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익숙한 흔적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기시감이 훅 밀려오는 순간. 라앵의 그림을 마주했을 때가 그랬다. 허공 위에 오선지처럼 뒤엉킨 전깃줄, 비슷한 색감으로 이어지는 대문들.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라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나의 시간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민을 안고 하염없이 걸었던 그 시간들이 묻어 있었다.

<Urban memory_Seoul 2>, 라앵

 

 어릴 적 자동차를 타고 종종 주택가를 지나곤 했다. 그럴 때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골목길 풍경은 늘 눈길을 끌었다. 낮에는 햇빛이 입구 언저리에서 비스듬하게 쏟아져 내리고 밤에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허공에서 바스러지는 곳. 바깥에서 훔쳐보는 안쪽의 풍경은 아무에게도 읽힌 적 없는 이야기처럼 비밀스러워 보였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세상에는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골목길은 내게서 잊혀가는 듯 했다.


<Urban memory_Seoul>, 라앵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나를 어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껍데기 속 내가 늦되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껍데기에 맞추어 자라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도 모르고 방향도 몰랐다. 뒤늦은 고민은 불안을 몰고 와 예상치 못한 감기처럼 나를 괴롭혔다. 마치 텅 빈 우주 한복판을 홀로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들려오는 거라곤 끝없는 침묵뿐. 아무도 내가 거기에서 앓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골목길이 나를 찾아온 건 바로 그 때였다.

 

<Urban memory_Cheongju 2>, 라앵

 

 다시 마주친 골목길은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잠시 머무르다 가라고 곁을 내어주는데도 모두들 금세 지나쳐 버리기 때문일까. 미세하게 금이 간 담장, 고개 꺾인 자전거, 녹슨 방범창처럼 곳곳에서 외로움의 냄새가 났다. 그 이유 모를 쓸쓸함이 나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A memory of city 17-4>, 라앵

 

 그곳에서 하염없이 걸었다. 때로는 나지막한 음악소리와 함께 터벅터벅, 때로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슬렁슬렁. 골목길은 좁고 구불구불한 게 꼭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미로 같았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 순간 요동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에게 말을 걸어볼 수도 있을 만큼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처음이었다. 내가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도.


<A memory of city 18-1>, 라앵

 

 당장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는 어린애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바깥이 아니라 안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으니까,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차근차근 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지나온 길이 없어 앞으로의 방향을 몰랐던 내게 골목길은 뒤돌아볼 수 있는 곳이 되어주었다. 마침내 골목길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우주에서 위태롭게 떠다니는 대신 단단한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A memory of city 18-3>, 라앵


 다시 한 번 라앵의 그림을 들여다본다. 어릴 적 나를 사로잡았던 골목길처럼 어딘가 비밀스러워 보이는 풍경들. 빛바랜 지붕을 타고 문장들이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누구나 저마다의 골목길을 하나씩 품고 있겠지. 그렇다면 저 문장들은 지금껏 이곳을 지나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문득 궁금해진다, 골목길 한 쪽을 채우고 있을 당신의 이야기는 또 어떤 것일지.



*


 <오후의 그림 한 잔> 세 번째 잔은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라앵 작가와 함께 마셔볼까 해요.

 이 글은 네이버 디자인프레스 블로그에 기고한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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