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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Dec 29. 2019

채워야 할까. 지워야 할까.

올해라는 책 한 권이 완성되어가고 있다. 하루라는 페이지가 쌓여 365장을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아쉬운 마음에 첫 페이지를 넘겨본다. 무엇이 적혀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 있겠지. 나는 믿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무엇인가 적은 기억이 났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믿었다. 종이에는 완벽하고 풍족하게 채워졌다고... 그러나 돌이켜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는 걸까? 내 책상에 놓인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열심히 한 페이지를 채우고 또 채우기를 반복했는데 말이다. 참 열심히 했다. 과거라는 시간을 평가하고 싶어서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페이지를 넘기며 아쉬운 마음만 한가득하다.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아쉽게도 기억은 희미한 채 듬성듬성 남겨진 만취한 다음날, 느끼게 되는 끊긴 필름과 같았다.


새해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새하얀 종이와 새 연필을 준비한다. 새로운 각오와 목표를 적는다. 마음은 조바심과 기대감이 교차한다. 어느새 종이에는 자기만족이라는 글자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는 날부터 하루를 기록한다. 한 페이지를 채울 때마다 빽빽하게 적힌 글자와 그림이 새겨졌다. 매일 마침표를 찍을 때면 붉게 물든 석양과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마음속에 담는다.


채우고 싶은 마음 자체가 욕심은 아닐까? 자기만족을 위해 그렇게 기록하고 남기고 빈틈없이 채우고 싶은 건 아닐까. 어제 같던 새해가 이제 지워지고 있다. 잠시 잊고 있던 지우개는 열심히 내가 기록한 페이지를 지우고 있었다. 시간이 지워지고 있다. 소리 없이 지워지고 있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책 한 권을 멋지게 완성하고 싶은 마음은 욕심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다. 지난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에 불과하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어김없이 지난 과거를 돌이켜본다. 계획한 것들이 이루어졌는지 평가한다. 자책하며 스스로 자존감을 챙기지 못하기도 하다. 아쉬운 마음만 가득한 시점이기도 하다.


어제 같던 새해는 어느새 올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지워지고 있다. 당연한 이치다. 내가 되려 호들갑 떠는 게 아닐까. 하루가 쌓여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다. 열심히 채운 걸 평가하지 않았으면 한다. 또 새하얀 종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 오늘이든, 새해의 시작이 오늘이든 숫자 하나 추가되는 것 말고는 특별히 바뀐 건 없다. 무엇인가 채울 욕심보다는 하루를 마감하면 지워지고, 또 지워질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게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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