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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Jun 21. 2019

허언증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여라.

5분이 지났다. 내 앞에 놓인 맥주잔 속에는 싱그럽고 상큼해 보이는 수많은 작은 기포가 춤을 추고 있다. 빠르고 천천히 간혹 리듬을 타며 올라간다. 작은 물방울들은 일주일 동안 쌓여있던 마음의 찌든 때처럼 맥주 거품과 함께 사라진다. 금요일 저녁, 직장인들을 설레게 하는 마법 같은 시간이 돌아왔다. 6월의 햇살은 꽤 오랫동안 남아있다. 이제 장마가 다가오고 무더운 여름이 시작될 것이다. 태양은 힘들게 버티고 있다. 그의 일과가 끝나간다. 지친 어깨는 오늘의 훈장처럼 더욱더 무거워진다. 그는 서쪽 저 멀리 떠나간다. 다음날을 기약하며 이별 인사를 한다. 그가 떠난 후, 원자번호 82의 순수한 납의 무게만큼이나 거추장스러운 훈장을 달고 허우적거리며 걷고 있는 좀비 무리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상점들의 간판에는 하나둘씩 야광 낚시찌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있었다. 아주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빛나는 낚시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다. 어느새 직장인들은 상점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고 있다. 작은 다락방에 둥근 테이블을 놓고 잘 요리된 과자와 음료수를 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어느새 그들은 흠뻑 취한다. 둥근 테이블은 아주 커다란 개그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다. 옆에서 앞에서 또 옆에서 왁자지껄한 말들 속에 더욱더 취해간다. 맥주잔 속에 활활 타오르는 기포가 보이고 이를 바라보는 또 다른 좀비 녀석이 보인다. 매일 아침 거울에서 보는 녀석이다. 화려한 불빛에 일그러진 얼굴에 마법처럼 무작위로 화장을 한 얼굴이다. 그 녀석의 뒤에서는 방금 전에도 확인한 아주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빛나는 낚시찌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다. 나는 문득 이 단어가 떠 올랐다.


거짓말쟁이


얼굴이 찌그러진 좀비가 내게 말한다. 너는 거짓말쟁이다. 볼품없고 나약한 존재다. 항상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너에게 실망하고 있다. 분명 너라는 존재는 심각한 허언증 환자다. 내 앞에 놓인 황금 빛깔이 유독 탐스럽고 시원스러워 보이는 맥주가 너에게만큼은 너무 아깝다. 시원스럽게 마실 생각은 하지 마. 그래. 너는 요새 더 심각해 보여 그리니 축배를 들 자격이 없단 말이야. 아참. 말이 조금 심했나. 닥치고 내 말을 꼭 들어. 사실은 사실이야. 너는 허언증 환자야. 다시 말하게 만들지 마. 또한 내게 욕하지 마. 너는 스스로 정한 우리의 규율을 어겼어. 분명 이건 사실이야. 알고는 있지?


찌그러진 얼굴에 웃음기 없는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다. 음산한 기분을 느낀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다. 내 귀에 속삭이는 그가 두렵다. 애써 외면하고 싶지만 자꾸 그는 내게 말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시원한 맥주가 나를 더 요동치게 한다. 한편으론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참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과 입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욕을 참아내고 싶었다. 분명히 내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맥주잔에 가득 찬 기포는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빠르게 없어진다. 다시 못 볼 황금빛 액체도 함께 없어지고 있다. 더욱더 빨라지고 있다. 맥주잔의 노르스름한 빛깔은 빛바랜 자홍색을 띤 둥근 테이블과 한 몸이 되었다.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좀비가 내게 말한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그것을 확보해.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1년간 버틴 것만으로 충분해. 너는 승리했어. 그래. 그 기분 내가 알고 있으니 걱정 마. 오늘만큼은 너에게 자축해도 좋아. 한 번 정도는 그렇게 해도 누구 하나 너에게 욕 할 자격은 없어. 그러니 일어나. 너는 강해. 딱 한 번이야. 너에게 상을 줘봐.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아무도 너에게 욕을 하지는 않을 테야. 걱정 말라고. 그러니 지금은 잠시 맥주잔을 뒤로하고 그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서 걷기만 하면 돼. 그리고 그것을 확보해. 그럼  평온한 너를 찾게 될 거야. 내 말은 항상 옳아. 나는 너에게 상을 주고 싶어. 오늘 수많은 훈장을 내가 알아줄게. 무거운 어깨를 내가 알아준다니까. 집중해봐. 단순해. 일어나서 그것을 얻어. 나는 너를 응원해. 분명 네가 좋아할 거야.


나는 남은 황금빛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의 응원에 살짝 자신감을 느끼며 일어났다. 둥근 얼굴을 한 좀비는 내 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를 다시 보기 위해서는 둥근 테이블에 앉아 이미 다 마신 맥주잔과 이야기를 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일어나서 걷고 있다. 메아리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 있는 그의 응원이 뒤로한 채. 그리고 그것을 확보했다. 나는 화려한 네온등 사이를 걷고 있다. 문득 저 멀리 욕하는 얼굴이 찌그러진 좀비가 보였다. 쓸데없는 환영이다. 내게 멀어져 간다. 나를 응원하는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좀비가 내게 빠르게 다가오더니 나를 흘낏 쳐다보며 웃으며 응원한다.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여


사진출처 : 영화 <신세계>




공상허언증(空想虛言症, 영어: pathological lying, pseudologia fantastica, mythomania)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짓말을 그대로 사실로 믿는 정신적 증후군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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