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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Jun 20. 2019

임상 실습

질문하고 메모하고 학습하고 고민하고

2001년 어느 장마철이 시작되는 7월이었다. 두려움 반 기대감 반으로 1시간 30분 동안 지옥철을 타고, 도착한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꽤 알아주는 종합병원이다. 8주 동안 병원에서 임상 실습.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세밀한 기억은 없다. 졸업 동기들과 찍은 사진과 병원의 냄새와 풍경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깨끗하게 준비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간결하게 매고, 새로 산 검은색 구두와 색상이 비슷한 검은 계열의 정장 바지를 입는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아주 순하고 깨끗한 흰색 가운이다. 이 녀석을 입는 순간 어깨는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무엇인가 대단한 걸 이룬 뿌듯함과 자만심이 온몸을 감싼다. 물론 새하얀 가운은 어색함과 행동을 제약시켜주는 묘한 기운을 동시에 가져다주곤 한다. 병원의 그 특유한 냄새와 환자복을 입고 있는 사람과 슬픔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들. 거대한 유리창에서 비친 앰뷸런스의 푸르고 시뻘건 네온등이 요란스럽게 내 눈을 자극했다. 그날의 아침은 전공책을 들고 임상 실습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을 맞아주었고 반가운 인사를 할 틈도 없이 검사실을 찾아다녔다.


병원이라는 이 넓은 바다, 내 전공은 진단에 도움을 주고 치료에  활용되는 의료영상을 만드는 곳이다. 방사선 분야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방사선에 관하여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거만한 학생. 아는 척했던 것 같다. 다행인 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뿐 내색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 정도 미련 곰탱이는 아니다. 자신감만큼 예습과 복습은 철저히 했다. 나름대로 자기 합리화를 통해 실습에 대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 그 학생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햇병아리 수준도 안 되는 볼 품 없는 자, 이름 그대로 실습생.



처음 임상 실습은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했다. 책에서만 보던걸 직접 현장에서 보고, 체험한다는 현실에 긴장했다. 때로는 그 스릴을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다면 실망도 커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실습을 하면 할수록 내가 나아가야 할 직업적 소명감과 경제적 미래관에 대하여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후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병원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부속기구와 같은 부품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이걸 할 수 있을까.부터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까지 8주 동안 내 머릿속엔 물음표만 박혔다. 그래서 그런지, 2번의 결석과 무단이탈도 자행했다. 그래서 남들 다 받는 A+ 학점을, 난 B로 끝났다. B 학점 받기도 어려울 텐데 어떻게 받았는지. 후회는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학점 따위에 내 인생을 점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습을 대충 하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예습을 철저히 했을 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르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많이 했다.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오히려 임상에 계시는 선생님들이 싫어할 정도다. 점심시간에도 질문해서 혼난 적이 있었다. 그중 한 분은 나를 따로 불러 좋은 조언을 해 주신 분도 계셨다.


그래도 대부분은 나를 귀찮은 존재로 취급했다. 이해가 된다. 그 병원은 우리나라에서 1, 2 순위를 다투는 정말 큰 병원이기 때문이다. 내원 환자가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바쁜 직장에서 한낯 질문 많은 학생은 꽤 귀찮은 혹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도 등록금이 아깝다는 생각에 많이도 <질문>하면서 앞서 말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곤 했었다. 8주라는 <임상 실습>이 끝나는 날이 다가올 때, 나는 알았다. 자양분이 된 선생님들의 충고와 조언은 뒤로한 채,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뿐이었다.

이 일을 하려면 목표를 크게 잡던가, 아니면 하지 말던가.


임상 실습을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는 참 유용했다. 모두, 선생님들을 괴롭힌 증거물이다. <질문>도 없이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면 분명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었을 테다.

이 일은 내가 할게 아니네.


다행히 <질문>의 힘은 컸고, 그때 많이 알게 되었다. 모르면 바보가 아니라 물어보지 않는 게 바보라는 사실. 힘들게 전철을 타고, 걷고, 뛰고, 내 직업이 될 전공을 학교가 아닌 현장에서 확인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임상 실습>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코스다.


임상에 있는 선배님, 선생님, 직장인, 연구자, 박사, 겸임교수 등 여러 단어로 부를 때가 있다. 하지만 다 빼고 또 빼서 한 단어로 정해서 말하고 싶다. 주말이 지나고 8주라는 <임상 실습>을 하는 너희들에게 말이다.


나는 임상 실습 <경험자>다.


<경험자> 입장에서 옆 친구에게 말하듯 적어봤으니 아주 가볍게 읽어 주었으면 해.   


인사 똑바로 하고 다니길, 어디든 인사가 기본이다. 공부 잘하든, 돈이 많든, 작은 아버지가 병원장이든, 큰 아버지가 총장이든, 관심 없다. 예의 없는 학생은 임상에 나와도 뻔하다. 지금부터 거울을 보고 인사 연습부터 해 보길 바란다.


아무 생각 없이 병원 복도에서 서성거리지 마라. 그럴 바에는 집에 가는 게 좋다. 재미가 없다. 흥미가 없다. 난 원래 학문에 관심이 없다. 내 직업이 아니다. 하며 생각하는 척하지 말자. 부모님 혹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등록금이 아깝다. 혹시 스스로 마련했다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 돈 아깝다고 생각하면 화장실 가는 것도 아까워해야 한다. 장학금도 본질적으로 국가 세금이다.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썩은 고기가 없을까.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처럼 서성거리지 말고 스스로 발걸음을 당차게 옮기길 바란다.


학점에 집착하지 말자. 나는 임상 실습 B다. 자랑은 아니다. 정말 결석도 했다. 왜 했을까. 그 이유는 그 당시 아무도 나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걸 느꼈다. 말 그대로 유령이 된 기분,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허수아비, 매미, 거머리 등이었다. 학생은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꽤 낮은 계급이기도 하다. 자칫 하찮은 존재로 전략되는 경우가 있다. 조심해야 한다. 그때, 나는 실험을 하고 싶었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선생님들은 알고는 있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정말 모르고 있었다. 참 어이없었다. 그렇다고 <경험자>가 했으니 나도 경험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랑 지금이랑 다르다.


학생은 몰라야 한다. 간혹 너무 많이 아는 학생들이 보인다. 너무 대견하고 신기하다. 공부도 상위권이다. 그러나 임상에 계시는 선생님은 다르다. 몸으로 배운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책으로 얻은 지식과 다른 형태다. 임상 실습은 이런 몸으로 배우는 지식이 많이 보이고 때론 이론적 학문을 탐구하기에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이렇다. "책에서 공부한 내용과 실전을 잘 구별하면 된다." 물론 많이 알면 금상첨화다. 그래도 모른다고 너무 자책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모르면 물어봐. 때리거나 욕하지는 않을 테니. 간혹 선생님이 모르면 화를 낼 수 있으니 그때는 눈치 빠르게 선제공격을 해라. “제가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박사급은 아니다.


동기부여가 될 사람 혹은 무엇인가를 찾아보라. 실습기간이 끝나면 어느 누군가는 직업과 사람에 대하여 실망이 생기고 기약 없이 자신을 책망하며 고민에 빠질 수 있다. 하늘처럼 우러러볼 수 있는 선생님도 있는 방면에 그 반대 성향을 가진 인물도 존재한다. 여기는 병원이라는 공간이다. 다양한 직종에 직장인이 존재한다. 모두가 똑같다면, 여긴 로봇 공장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본인의 입맛에 너무 맞는 좋은 사람, 좋은 선생님, 좋은 멘토를 찾아보는 게 좋다. 꼭 찾아서 연락처(이메일, 전화번호) 정도 메모해 둬라. 사람은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자주 연락 오는 친구들이 있다. 예전에는 취업, 연애, 가정 등 많은 안주거리를 준비하고 술잔을 함께할 여유가 있었다. 지금은 못 한다. 잘 못하면 여학생 꼬신다고 오해받을 수 있고, 지금은 체력을 넘어 잘 못하면 간암에 걸릴 수 있다. 건강은 스스로 챙겨야 할 나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내 주위를 둘러보면 문을 두드리는 자가 많다. 어제도 고민 상담하는 친구가 있었다. 자신을 자극해 줄 누군가 혹은 무엇이 분명 있을 거야. 그러니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갑자기 빨리 말하고 싶어 진다. 목사님 설교처럼 재미없지? 핵심만 쓰련다.


밥은 든든히 먹고 다녀. 병원에서 나오는 밥이 맛있어. 아니 건강식이야. 그러니 아침 굶었다고 힘들어하지 말고, 점심을 기다려. 많이 달라고 식당 이모님께 말만 잘하면, 너의 허기진 배를 충분한 양으로 초 저녁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야. 욕도 많이 먹어야 하나? 그건 좀 그렇지만, 선생님들의 충고와 조언을 많이 챙겨 먹어야 해. 간식처럼 수시로 받아먹어야 해. 그래야 너의 머리가 총명해지고 너의 사고가 폭넓어질 테니.


각 파트에 가기 전 예습은 필수. 대부분의 학생들이 준비를 하고 가겠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이라면 명심해야 해. 예습 안 하면 네가 심심해. 임상 선생님들은 일하는 중이거든. 하나부터 열까지 교수님처럼, 아니 옆집 오빠처럼 알려줄 수 없어. 그러니, 꼭 주말에 미리 책을 보고 가는 게 좋을 거야. 이와 반대로 모범생들은 하나면 잘 준비하면 될 거야. 임상에서 접한 모든 것들이 책에 있는지 혹은 책에 없는지. 링크를 시켜보는 방법이야. 간혹 정말 모르는 걸 볼 수 있거든. 책에도 없는 것들. 그것까지 알면 자신감 업!!! 시킬 수 있어. 확실해. 준비 없이 일주일을 지낸 파트에서는 선생님도 말 수가 없어지거든. 그걸 느끼는 순간 너는 끝이야. 아주 처참하게 찢긴 색종이처럼 너덜너덜 사방에 뿌려질 거야. 명심해. 준비가 최선의 방어야.


몰라서 혼나면 열이 받을 거야. 울고 싶을 때도 있어. 그러니 공부해. 그게 살길이야. 기본적인 소양은 갖추도록 하고 나머지는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며 예행연습을 해봐. 그럼 어느 정도 <질문>이 생기도 답을 찾는 스스로를 보게 될 테니. 인간은 많이 생각하는 걸 싫어한다고 하던데. 그 인간에 속하고 싶다면 지금처럼 해도 무리가 없을 거야. 다만 고민하는 인간일수록 행복해진다는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틀린지는 모르지만 그냥 알아서 선택해.


더 쓰고 싶은데 너무 잔소리가 많은 것 같아서 그만 말해야겠어. 마지막은 말이야. 음...... <임상 실습>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봐. 본질적으로 무엇을 하든 목적이 명확해야 해. 가령 방사선종양학과에서 일주일 동안 내가 무엇을 알게 될 것이며, 정리할 내용은 어디까지인지. 영상의학과에서 주로 응급 촬영은 어떤 경우에서 하고, 선생님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너무 많겠지만, 8주간 8개의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미리 가늠하고 들어갔으면 해. 예전에 나는 워낙 잘 몰라서 중요한 사항을 <질문>하며 내가 아는 게 맞는 건지, 틀린 지 묻다가 실습이 끝나더라고. 열심히 묻다 보면, 시간이 느리게 가진 않을 거야. 초음파실 빼고.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각 파트에서 무엇을 얻을지 미리 파악해 두면 좋을 거야.





계획은 정말 간단히 쓰는 건데.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미안해진다. 아무쪼록 <임상 실습>은 부담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가 공존한다. 모 실습 학생은 그렇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임상 선생님들은 정반대다. 그들은 교육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이 분명 있지만, 학생들의 소양과 눈빛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즉, 학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멍청한 학생이 되지 않길 바란다. 흥미롭고 모르는 걸 숨지기 않는 멋진 실습 학생이 되었으면 한다.


무의미한 시간으로 8주를 허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학생은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겁먹지 말고 차분하게 8개의 과제를 격파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달리길 바란다. 미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또한 그 정반대도 상상하고 고민하다 보면, 병원이라는 복잡한 생태계에서 잘 살아남는 방법과 이 곳으로 들어올 용기를 키우길 바란다. 항상 처음이 어렵다. 자만하지 말고, 하루하루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8주를 알차게 지내길 바란다. 건투를 빈다.


-사진 출처 : <졸따구 L>과 치료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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