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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Aug 08. 2019

배신자 I

원숭이

나는 화창한 날씨에 나무 그늘 아래에 한없이 요리조리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는 한 녀석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나무에는 꽤 튼튼해 보이는 줄이 연결되었다. 검은 그림자를 보이며 나타난 그 녀석은 물 만난 고기처럼 줄 위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관찰해 본다. 가느다란 두 다리는 줄에 매달려 있고,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뻗은 손가락은 제법 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녀석은 나를 알아보았는지 발가락 사이에 힘을 주고는 두 팔을 땅 아래로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녀석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다시금 줄을 타고 커다란 나무로 향했다.


나는 저만치 나를 경계하는 원숭이에게 말을 걸었다.

“네 줄에 그네를 달아서 놀아도 될까?”

경계하는 눈빛은 이내 나무 사이로 매달린 줄이 자신의 것이라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상관없어. 다만 내 줄이 망가지면 그땐 책임져야 해.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나는 줄을 한 번 튕기고는 준비한 그네를 설치했다. 줄과 줄 사이가 조금 느슨해졌지만, 그네 타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원숭이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를 뚫어지게 지켜본 원숭이는 그런 내게 소리쳤다.

“재미있어? 재미있겠다. 많이 놀아. 나는 나대로 여기서 지켜볼게.”


원숭이는 나뭇가지에 매달리며 철봉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놀이터에서 재미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원숭이의 말 한마디에 일순간 무너졌다.

“야! 여기 뭐가 있게?”

나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네를 멈추고 원숭이를 바라봤다. 그의 손에 번쩍이는 금속 물체가 들려 있었다.

‘가위?’

나는 알 수 있었다. 원숭이가 들고 있는 금속 물체는 가위다. 그런 나를 쳐다보며 원숭이는 말했다.

“이게 뭔지 알지? 내가 이걸로 줄을 잘라 버릴 수 있어. 타던 그네는 그대로 타고 있어. 혹시 멈추면 이걸로 줄을 자를 거야. 그럼 넌 어떻게 되는 줄 알지?”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발 밑에 무엇인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셀 수 없이 뾰족한 송곳을 가진 또 다른 녀석은 내 바로 발아래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 녀석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생각도 잠시 또 다른 녀석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땅에 엎드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원숭이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즐거움은 공포가 되고 나는 초조했다. 원숭이가 들고 있는 가위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원숭이는 가위를 흔들 거리며 기분 나쁜 잇몸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알게 모르게 킁킁대는 소리를 질러대며 내 표정을 보고 있었다. 나는 부탁을 했다. 제발 가위로 줄을 끊지 말라고 말이다. 이 말도 덧붙였다. 줄이 끊어지면 너의 즐거운 놀이터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원숭이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기다란 두 팔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져 있었다.


“원숭아. 나는 분명 네 놀이터에 매달린 줄을 망가뜨리지 않았어. 나에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잘 못한 게 있니? 제말 소리만 지르지 말고 말 좀 해봐.”

원숭이는 손에 든 가위를 또 다른 손으로 옮기며 나를 노려봤다.

“그네에서 놀고 있는 네가 너무 싫어졌어. 내가 만든 줄에서 이제 꺼져줘야겠어. 그럼 안녕.”

햇빛에 반사된 가위는 시퍼런 사무라이 검처럼 순식간에 줄을 향해 춤을 췄다.




[믿음을 등지는 행위가]가 배신의 정의다.

배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전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야만 한다. 최소든 최대든 믿음이라는 단어는 암묵적인 도의적 관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가 사회적으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던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은 작은 끈 하나가 서로의 가슴과 가슴으로 연결된 것이다. 믿음이란 입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서로 눈 빛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서로 손을 잡고 있어서도 아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믿음이란 끈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슴에 자라고 연결된 것뿐이다. 그럼 배신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근이 끊어진 상태다. 더 이상 끈은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끈이 있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배신이 부작용을 낳는다는 점이다.


배신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이렇게 표현한다.

“뒤통수를 맞았다.”

보이지 않는 끈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게 된다. 결국 상대에 대한 분노를 낳고, 두려움과 상처뿐인 트라우마라는 상처를 남긴다. 중요한 사실은 서로가 느끼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이를 되돌리기 위한 처방은 믿음뿐이다.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무엇인지 알지만 우리는 구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구했다고 치더라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별 의미 없을 수 있다.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두커니 앉아서 벽만 보고 있으면 답은 나오질 않는다. 판단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끈의 정체를 말이다.


믿음을 이용해 배신하는 건 지극히 사기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끈을 일부러 연결하고 상대가 신뢰하도록 하는 자는 사기꾼인 샘이다. “뒤통수를 당한 자”에 대한 우롱이다. 보통 사기당한 사람은 또 당한다는 말을 한다. 명석한 두뇌로 우리는 뒤통수를 조심해야 한다.


배신으로 인한 부작용은 상대에 대한 분노와 함께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온다. 자존감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후회라는 상처로 남는다. 또한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로 스스로에 대한 고뇌에 괴로워해야 한다. 남은 건 마음의 상처라는 흔적뿐이다. 믿음을 미끼로 나의 소중한 마음이 뿌리째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난도질당한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우리 사이에 믿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illustrated by 김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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