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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Aug 09. 2019

쪽빛 바람

검은 선글라스는 태양이 보내준 빛을 조금이나마 차단해 준다. 저 멀리 나를 데려다준 커다란 쾌속선이 보인다. 화려한 무대를 숨죽이고 바라보는 수많은 눈빛, 그녀는 도약과 함께 점프를 한다. 솜털처럼 가볍게 아래로 착지하여 서서히 미끄러진다. 드넓은 빙판에서 한 마리의 백조가 그렇게 흰 거품을 뿌리며 멀어져 간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자태를 훔쳐보며 다시는 보기 힘들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푸른 바다 위 작은 섬들을 둘러보고 바다 위 작아지는 쾌속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본다. 

<안녕. 내 사랑. 그리고 나의 어제와 시간이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유 있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손님을 맞이하는 인사와 같았다. 고양이는 앞발을 혀로 핥고서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어느 집을 가리켰다. 지붕을 덮은 푸른색이 주위에 있는 집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어깨에 매달린 작은 카메라로 그곳의 시간을 낚았다.


문을 열어 들어갔다. 지난 1년간 숨겨진 보물창고가 열리듯 내 마음에 풍성한 기분이 열렸다. 오랜만에 찾은 이 공간은 나만의 휴양지다. 확 트인 넓은 앞마당이 보였다. 여러 친구들과 화롯불 앞에 바비큐 파티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작은 방 2개와 작은 주방은 초라해 보인다. 나는 짐을 풀었다. 방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더운 공기를 식히고 싶다. 앞마당에 물을 뿌렸다. 작은 공기 입자가 정오의 빛에 반사되었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검은색 그리고 모든 사물의 색이 내 앞에 춤을 춘다. 작은 의자에 앉았다. 내 답답한 마음은 뜨거워진 열기가 식어가는 앞마당처럼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마음은 세상의 모든 색상만큼 천차만별이다. 흰 도화지 색은 미래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을 대변해 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이라는 노란색을 갖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야 하는 직장인의 색과 시간에 쫓기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시샘하는 검은 마음은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 몸은 그곳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을 원하는 비틀린 자아를 나타내는 보라색도 있다. 나를 찾아가면서 진정 내가 누구인지 알듯 모를 듯 작은 희망을 일깨워주는 초록색은 내 벗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으로 다시 한번 열정을 부르는 붉은색은 지칠 줄 모른 나의 생명을 일깨워준다.


복잡한 마음은 뒤로 하고 싶다. 애써 외면하고 싶다. 머릿속을 비워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싶다. 오로지 내가 읽은 지금의 책 한 권과 눈을 감고 느껴지는 상상의 무대를 채워 넣고 싶다. 눈을 감고 작은 책에 한 문장을 적어본다.

<바람 한 점을 남기고 누군가의 작은 숨소리가 되자>


그런 모습을 검은 고양이가 지켜보고 있다. 하품을 하며 나를 보고 있다. 고개를 돌리고 작은 귀를 흔든다. 긴 꼬리를 흔들며 사뿐히 담장에 올라선다. 근엄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는 다시 저 멀리 바다를 응시한다. 그리고, 소리 없이 웅크리고 앉아 하품을 했다.


다양한 색을 가진 마음 하나를 끄집어냈다. 나는 앞마당에 걸린 빨랫줄에 그것을 걸어놨다. 다른 색을 가진 마음을 줄에 걸었다. 또 다른 마음, 또 다른 마음, 또 다른 마음을 끄집어냈다. 잠시 멈추고 허리를 펴고 앞을 바라봤다. 마당에는 온통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졌다. 색동저고리는 자신과 닮은 작은 아이를 찾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다. 바람 한 점이 앞마당에 걸린 마음을 춤추게 한다. 하나 둘 장단에 맞춰 움직인다. 흡사 멀리서 보면 비 오는 날 창가에 비친 화려한 네온등에 반사된 풍선과 같았다. 하늘과 바다는 우리의 지붕이다. 다양한 색을 가진 마음들이 푸른색 쪽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색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바라본다.

<하늘과 바다를 닮은 쪽빛>


[illustrated by 김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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