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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Aug 11. 2019

파도

수상한 그 녀석

한 여름 뙤약볕에서 수상한 그 녀석에게 당했다. 허탈한 마음은 화로 변한다. 나는 다가오는 바람과 손을 잡고 그에게로 향했다. 오로지 먹잇감에 집중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사자처럼 그를 노려봤다. 힘을 주고 앞발에 숨겨진 발톱을 꺼냈다. 칼날 같은 송곳니를 벌리고, 천둥소리를 내며 그 수상한 녀석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내 공격을 비웃 거리며 유유히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약 45.5억 년 동안 여기 이름 모를 해변을 지키고 있었다. 태초에는 수십억 년을 홀로 외로이 지냈다. 고대부터 작은 삼엽충 무리들은 내 발아래에서 일생을 바쳤고, 시간이 흐를수록 수많은 무리들은 이곳을 떠나 이동했다. 이곳을 떠나지 않은 무리들은 내 발아래 깊은 곳, 어디론가 묻혔다. 화석으로 남아 아직도 함께한다.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플랑크톤부터 거대한 수장룡인 무라에노사우르스와 쇼니사우르스까지 그들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흔적을 함께 겪었다. 


지난 옛 친구들은 거의 모두가 사라졌고, 지금은 인간이라는 새로운 녀석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그들은 나약한 존재다. 내 눈앞에서 오래 버틴 종적을 본 적 없었다. 홀로 남은 인간은 우리 앞에서 한 마리 벌레 만도 못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들에게 물건을 만들고 움직이도록 하는 지능과 재능을 선물했다. 인간들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그들에게 편리한 그 무엇을 만들어냈다. 

저 멀리 항구에 그 거대한 것이 서 있었다. 유람선은 가끔 우리들의 단잠을 깨웠다. 요란한 천둥소리와 눈이 부실 듯 밝은 거짓 태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수상한 그 녀석은 유유히 내 머리 위에 둥둥 떠다녔다. 그는 태양과 푸른 바다 아래 빨간색 수영복을 입었다. 화려한 와인색 물감으로 그려진 서핑 보드가 그와 한 몸이 되어 미끄러지듯 우리 옆을 지나갔다. 일렁이는 잔물결이 내 콧등을 간지럽혔다. 나는 참지 못해 재채기를 했다. 옆에 있던 친구는 나를 힐끗 보며 비웃는다.

“어이 친구. 실력 좀 보여줘. 저 빨간 벌레가 아직도 네 옆에서 웃고 있네. 내가 처리할까? 지켜만 보고 있자니 너무 안쓰럽군. 마음이 약해진 거야? 혼 좀 내줘봐.”


‘빨간 벌레? 그래. 수상한 이 녀석은 빨간색 보드에 작은 벌레 인간에 불과하지. 내가 가만 둘 수 없지.’

거침없이 말을 내뱉은 친구는 저만치 모래알과 함께 사라졌다. 잠시 하늘 아래 흰 구름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내 앞에서 친구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주춤하며 친구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깜짝이야! 새치기하면 안 되지?”

“아. 미안해.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갑자기... 바람 때문이야.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내가 먼저 갈게. 그럼, 이만.”


방금까지 우리는 가벼운 바람(On shore)과 놀았다. 이 바람은 육지에서 온 손님과 같은 존재다. 바람이 바뀌었다. 가벼운 바람은 손을 흔들며 저만치 멀어져 갔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Slide shore)이 우리에게 인사하며 작은 파도를 만들어주고 도망갔다. 그렇다. 바람이라는 친구는 수시로 바뀌고 우리를 놀리며 술래잡기를 한다. 우리의 놀이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중 하나다.


한눈을 파는 사이, 수상한 그 녀석이 해변에서 빨간색 보드를 들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를 관찰하는 듯 보였다. 갑자기 커다란 빨간 크레파스가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을 색칠하고 있었다. 흥겨운 음악이 들렸다. 어두 컴컴한 밤하늘에 별이 반짝거린다. 나는 어젯밤 해변에 서성거리는 그 수상한 녀석이 떠올랐다.


더운 바람은 내 어깨를 스치며 시원하게 해변을 향해 비행했다. 깜깜한 해변은 서서히 밝아졌다. 유람선이 검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다. 빛나는 사각 스티커는 검은 바다 위에 밤하늘의 별보다 더 환하게 모자이크처럼 붙었다. 유람선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과 별빛보다 환한 폭죽은 정말 멋있고 맛 좋은 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먹은 듯 감미로웠다. 가까운 해변에서 어느 무리들이 폭죽놀이를 하며 소리쳤다. 우리는 덩달아 흥이 났다. 


육지와 바다에서, 흥겨운 폭죽과 음악이 뒤섞여 리듬을 타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우리도 장단에 맞춰 리듬을 탔다. 우리의 노랫소리는 푸른빛 은하수의 밤하늘과 유람선이 내뿜는 밝은 빛과 섞였다. 하나의 공동체는 흔들거리는 바닷물 속 모든 생명들에게 들려주었다. 우리의 관현악단 협주곡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했다. 잠시 조용한 피아노 소리는 해변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과 조우를 했다. 바람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는 사라졌다.


“저기~ 수상한 그 녀석이 있어~ 쉿! 조용히~ 저기 있어.”


남자는 혼자가 아니다. 아리따운 여자가 그의 옆에 있었다. 둘은 한여름 밤이 만들어준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해변을 따라 달빛에 반짝거리는 모래알을 세어보며 걷고 있다. 그들 옆에는 그들과 닮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림자는 하나로 합쳐 달빛을 향해 걷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서로 눈빛을 보며 놀란다. 서로 입술을 훔쳐보며 웃는다. 지금 이 순간, 대자연이 부르는 노랫소리와 유람선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음악소리는 사랑을 담아 감동의 하모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바람은 나를 그들에게 인도해 줬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말소리는 희미하다. 힘을 내자. 바람아 힘을 내자. 오늘따라 바람은 나를 도와주지 못하고 힘없이 사라졌다. 나는 바람을 다시 불러 해변으로 향했다. 조금씩 들려온다. 그들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내는 모래알 굴러가는 소리와 바다 거품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들과 닮은 그림자를 삼킬 때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좋네. 역시, 바다가 좋아. 비도 안 오고 날씨도 좋다. 어때?”

남자는 발아래 모래알을 비벼가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정말 좋다. 어떻게 알았어? 낮에는 엄청 덥더니 지금은 너무 시원하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를 바라보며 해변에 밀려오는 작은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우리는 숨죽여 조용히 그들을 응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우리들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찬란한 협주곡이 울려 퍼지는 유람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좋지? 내가 얼마나 찾아봤는데. 기분이 좋네.”

남자는 가슴을 펴고, 양팔을 벌려 하늘 높이 올리더니 다시 말했다.

“저기 사람들 좀 봐. 우리처럼 내일 서핑하러 온 사람들일까?”

여자는 자기 발등에 왔다 사라지는 거품 물이 마냥 신기해하며 웃는다.

“그럴지도. 여기는 파도가 끝내줘. 저기 봐봐. 소리도 웅장하고 파도가 밀려오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아?”


파도소리는 잠잠해지고 여자의 말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너머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갈릭 스파게티에 있어야 할 버터에 잘 구워진 새우가 없을 때, 우리는 당황한다. 그녀 역시 그런 표정을 지으며 그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기?”

남자는 무엇인가 홀린 듯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야!”

“아니. 어. 아니야.”

그도 당황했는지 그녀를 보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야!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아… 그게… 뭘 본다고 그래~”

그녀는 방금까지 남자가 바라본 시선을 되짚었다.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움푹 파인 모래 구덩이에 환한 불빛이 하늘을 향해 뻗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 손에 칵테일 한 잔을 들고 있었다. 흥겨운 음악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화려한 무지개 별빛과 경쾌한 음악에 한 무리의 사람들은 맨 살의 비키니 차림이었다. 아직도 더운지 그들은 칵테일 한 잔에 시원한 맥주 샤워를 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유혹적인 춤사위와 매혹적인 음악이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그들의 유흥에 빨려 들어갔다. 화려한 야광색 비키니는 그들의 잔치에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다. 네온등에 비친 칵테일 술잔과 한 여름밤에 울려 퍼지는 경쾌한 음악이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지금 유혹하는 무리는 모두가 여자들이다. 바닷바람에 취한 비키니 여자들. 


입이 살짝 벌어진 여자는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이윽고 철부지 어린이를 혼내 듯 말했다.

“야! 그렇게 좋아? 눈이 돌아가네. 그냥 저기로 들어가!”

“아니. 보기만 해도 좋네. 비키니도 그렇고 다들 이쁜데!”

남자는 입을 쩍 벌리며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되묻는다.

“아니… 아 그게…"

자신의 신체기관의 일부를 탁하기에 너무 늦었다. 무의식이란 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가늠하기 힘든 존재다. 그의 말을 그녀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머리에 꽂힌 비수 하나를 빼더니 그 남자의 가슴을 향해 말했다.

“뭐? 너라는 인간은 참 별수 없구나. 저번에도 그러더니. 더 이상 못 참아!”

여자는 휙 뒤돌아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슬그머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그림자 하나가 나를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마주쳤다. 순간, 나는 기침을 했다. 나의 거친 물방울이 그 남자의 얼굴에 뿌려졌다. 남자는 나를 째려보고, 멀어져 가는 그림자 하나를 향해 소리쳤다.

“야~ 또 왜 그래~ 정말 이럴 거야?”


해변에서 베토벤의 월광(Moonlight) 소나타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우리들도 그들의 리듬에 맞춰 목소리를 줄였다. 그들의 그림자가 멀어지고 해변은 조용해지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한 마음으로 해변을 향해 서서히 몸을 맡기고 차갑게 빛나는 달빛을 향해 잠을 청했다.


수상한 그 녀석은 아직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녀석은 1년 전에도 여기 있었다. 그날 밤도 어제처럼 해변에 함께 걷던 여자가 있었다. 어제 그 여자는 아니다. 그 녀석은 2년 전에도 여기 있었다. 그 여자도 달랐다. 모두 다른 여자에 그 녀석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들의 그림자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수상한 그 녀석은 빨간 보드를 좋아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 녀석은 빨간 보드를 가슴에 데고 열심히 패들링을 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녀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오는 바람을 의식했다.

‘이때다. 좋은 기회군. 기다려라 수상한 그 녀석! 아니 빨간 벌레 녀석!’

내 옆에 많은 관객들이 숨죽여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 숨을 크게 쉬며 바람에게 말했다.

“어이~ 나 좀 세차게 밀어줘~”

“걱정하지 말아~”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나는 빨간 벌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상한 그 녀석은 푸른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빨간 소금쟁이처럼 눈에 확 띄었다. 나는 돌격했다. 빨간 벌레는 보드에 올라서더니 내 어깨 옆으로 돌아 움직였다. 동시에 나도 몸을 살짝 비틀었다. 서서히 피크(peak, 파도의 가장 높은 위치)를 만들어내던 나는 그에게 돌진한다. 순간 하얀 거품이 일었다. 빨간 벌레는 당황했다. 하지만, 보통이 아니다. 잠시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평소 익힌 능숙한 솜씨로 내 허약한 부분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나를 피해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추격했다. 바람의 힘은 오래가지 못한다. 나는 조급 해졌다. 하나, 둘. 그리고, 순간 하늘 높이 솟아, 깊고 푸른 바다를 향해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빨간 벌레를 향해 내 온몸을 내리꽂았다. 


“어~ 어~ 이런, 읍!”


빨간 벌레는 내 어깨에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내 발아래에서 허우적거렸다. 내 튜브(tube, 파도가 무너지면서 만드는 터널 같은 모양)에 갇혀 짠내 나는 바닷물을 먹고 있었다. 조용히 숨죽여 지켜보던 관객들이 하나 같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원샷! 원킬!>

<속이 다 시원하네!>


[illustrated by 김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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