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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Sep 07. 2019

사색의 공간과 시간

야근을 마치고 퇴근을 했다. 차에 몸을 싣고 운전대를 잡았다. 하늘을 올려 봤다. 바람이 눈물을 흘리는 중인가? 주르르 비가 쏟아지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와이퍼를 켰다. 차창에 달라붙은 물방울 여럿이 없어졌다. 하지만 또 달라 붙였다. 검은 하늘 아래 전조등 하나만 믿고 나는 운전대를 잡았다. 앞만 보고 달린다. 퇴근길은 신호등에 따라 운이 달라진다. 마법처럼 절묘하게 초록색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브레이크 페달을 수시로 밟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비도 내리고 늦은 시각이라 차가 많지 않았다. 한산한 길 위에 어떤 퇴근길이 될지 궁금해진다.


차 안은 조용하다. 나는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켰다. 자극적인 뉴스가 있나? 버튼을 요리 돌려보고 조리돌려봤다. 모두 평범하고 뻔한 이야기뿐이다. 더군다나 잘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와 중국어가 섞인 소리가 늦은 저녁 라디오를 지배한 듯했다. 지금, 축 늘어지고 피로에 정복당한 몸과 마음이 내게 조용함을 원하고 있다. 라디오를 껐다. 빗방울이 차창밖에 부딪치며 음표를 만들고, 와이퍼가 좌우로 움직이며 쉼표를 찍는다. 조용한 차 안에 4개의 바퀴가 빗길 위로 스르르 굴러가는 화음을 내고 있었다. 결코 차 안은 조용하지 않았다.  


피곤한 하루가 지나는 중이다. 타인이 침범할 수 있는 공간에서 하루를 보냈다. 지금, 나에게 사색의 공간과 시간이 주어졌다. 정신없이 스쳐가는 하루를 이렇게 차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니. 갑자기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차창 넘어 신호등은 마치 내게 최면을 걸듯 색을 바꿨다. 이와 동시에 동그란 바퀴가 미끄러지는 소리를 내며 사색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멋지고 고풍스러운 서재에 꽂힌 생각들, 폭포처럼 무너지는 순간이다. 카테고리는 나부터 시작해 가족, 집에서 직장, 싫고 좋은 것, 할 일과 해야 할 일,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상대가치도 없는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내일은 또 누굴 만날지, 오늘은 몇 시에 잘 것이며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야 할지, 나는 몇 살이고, 지금은 몇 년인지, 작년은 무엇을 했으며, 10년 뒤는 어떻게 바뀔지, 지금 나는 어디로 가는지.


사색의 범위는 제약과 한도가 없다. 나는 조용한 차 안에서 창에 부딪치는 빗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느낌에 올라탔을 뿐이다. 수많은 잡념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다. 운전대에 올려진 두 손을 내리고 두 눈을 감았다. 조용한 공간에 무한한 시간이 허락된다. 일부러 작은 미소를 띤다. 이 순간이 행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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