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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Sep 14. 2019

정수기 오줌

달콤한 추석 연휴다. 새벽에 문자가 날아온다. 직감이란 참 신기하다.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게슴츠레 눈을 비벼가며 문자를 봤다. 직장에 비가 쏟아졌다. 천장에서 누군가 물을 뿌렸다.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휴일인데... 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아니지 지금은 새벽이니 차가 없으니 금방 가겠군. 바로 가? 아니야. 그래도 휴일인데. 누군가 가려나? 아니야. 아니야...’ 

나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차에 시동을 킬 때까지 ‘아니야...’를 외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누군가 사태를 파악하고 초기대응으로 마무리가 된 모양이다. 복도 바닥을 거쳐 천장을 올려봤다. 누가 살고 있는 거 아냐? 또 휴일이 나타나다니. 그 누군가가 이불에 오줌을 싸, 대륙의 지도를 아름답게 그렸다. 흔적이 여러 군데다. 쫓아갔다. 의료장비가 있는 방에도 그 녀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계자를 통해서 나는 그 녀석이 누군지 알았다. 바로 위층에 거주 중인 정수기다. 그 녀석은 휴일이 시작될 때부터 조금씩 오줌을 흘렸나 보다. 정수기 오줌발에 이런 달콤한 휴일을 즐기게 되다니, 참 고맙구나 정수기. 듬직한 후임의 빠른 처리를 뒤로 한채 차에 올라탔다. 아직 가야 할 행선지가 남아 있었다. 미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운전대를 잡았다. 


몇 년 전, 어렴풋이 휴일인 그날이 기억난다. 책상 위로 물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여름이었다. 마치 물놀이장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물건을 옮기고 덮고 물기를 닦았다. 참 달콤하고 씁쓸한 날이었다. 아직도 막내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천장을 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다음날 아침, 만신창이가 된 사무실을 보고 있을 때, 마침 옆에 있던 환자가 말했다. 

“이게 뭔 일? 치료는 할 수 있나요?” 


흐린 기억 저편에는 여러 키워드가 남아 있었다. <휴일, 물벼락, 고무장갑, 힘듦> 또한 신경 쓰는 자만 신경 쓴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렇지만 오늘도 <솔선수범>을 보여준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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