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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종해 Apr 12. 2017

유년시절




완행열차가 요란하게 아이 옆을 지나쳐 갔습니다.









아이는 길게 숨을 들이마십니다.

봄의 풀내음과 꽃향기를 가슴에 가득 담습니다.

손에 든 단어장을 펼쳐 영어단어를 읊조리다가 금세 싫증이 났는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무서운 녀석을 만났습니다.

황소 한 마리가 뚝길 한복판에 떡 하니 서서 풀을 뜯어 먹고 있습니다.

아이는 몇 발자국 뒤에 서서 망설입니다.

며칠 전부터 저 녀석이 느닷없이 아이를 쫓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멀리 돌아서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수 없습니다.

돌아서 가면 분명 지각할 게 뻔하니까요.

아이는 열심히 풀을 뜯고 있는 황소가 자신을 알아채지 못한 것을 눈치 챕니다.

풀이 무성한 경사지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살금살금 걸음을 옮깁니다.

식은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힙니다.

황소는 그때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이는 이때다 싶었는지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황소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더 빨리 달릴수록 더 크게 들려옵니다.

등골이 오싹하고 피가 머리꼭지까지 솟구칩니다.

교문에 가까워지자 겨우 안심하여 돌아다봅니다.

황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이마의 땀을 닦아냅니다.

교문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났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조잘조잘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이는 뚝길에서 며칠째 황소와 그렇게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일방적으로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아이는 등굣길에서 늘 ‘소가 사라져주길’ 기도했습니다.









어느새 풀들이 훌쩍 자랐고, 꽃들이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아이는 그날도 두려움을 안고 뚝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황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아이는 황소가 사라진 뚝길이 이젠 허전합니다.

뭔가 하지 못한 꼭 한 가지를 놓친 기분이 듭니다.









30년이 지났습니다.

어른이 된 아이의 기억 속엔 아직도 그 황소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지 못한 한 가지를 떠올립니다.

“좋은 추억이 되어줘서 고맙다. 황소야”



2017. 4. 12 

-jeongjong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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