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오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겸허하게 사랑을 대하게 된다.
스페인 세비야 여행 동안 묵었던 숙소의 주인 파비오. 처음 숙소를 찾아가던 날, 숙소가 어딘지 물라 골목길을 서성이고 있었다. 좁다란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창문 너머로 유쾌하고 정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KIM?" 낯선 곳에서 길을 헤매고 있던 나의 긴장감이 포근한 세비야의 날씨처럼 따뜻한 그 목소리에 사르르 녹아 내렸다.
진하게 묵은 담배 냄새와 함께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던 파비오. 까무잡잡한 그의 피부가 그의 드러낸 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3층 테라스가 딸린 나의 숙소는 활기차면서도 아늑했다. 테이블에 놓인 세비야 관광지도와 맛집, 플라멩고 공연장 등을 정갈하게 담고 있는 종이들. 파비오는 친절하고 차분하게 나에게 세비야를 소개해줬다. 큰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던 나이기에 더욱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무질서해 보이거나 사소한 공간일지라도 모든 공간들은 그 주인의 성격을 닮고 있다. 침실, 부엌, 욕실, 테라스 곳곳에는 파비오의 세심하고 친절한 배려들이 여과없이 묻어나 있었다.
파비오가 추천해 준 전통 시장에 둘렀다. 복닥거리는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 쳤다. 파비오였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태양같이 눈부시고 호쾌하게 웃던 파비오. 파비오는 시장에서 저렴한 신발 한 켤레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낯선 인파들 속에서 얼어 있던 나를 땡!하며 태양처럼 녹여주고 그는 떠났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춤 수업에서 만난 포르투갈 친구 파비오.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우연히 대화를 하다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파비오가 자신의 근무지인 덴마크로 돌아간 이후로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안부를 나눴다.
내가 포르투갈 여행을 가게 된 날, 그 친구는 맛집과 가볼 만한 곳들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긴장된 나를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포르투갈 사람들의 친절함을 말하며 나를 다독거려 주었다. 한국 문화와 언어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한국 여행 계획도 자랑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그가 낯도 가리며 조용한 성격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얘기를 나누면서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하고, 이곳저곳 다양한 공간에 있기를 좋아하는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퐈비오! 그 친구들 덕분에 나는 타국에서도 따뜻함으로 나를 감쌀 수 있었다.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Fabio는 이탈리아어, 라틴어, 스페인어를 주요 어원으로 하는 콩재배자를 뜻하는 남성 이름이라고 한다. 가장 인기 있으면서 흔한 이름이라고 한다. 보통의 이름을 가진 그들은 나에게 특별한 사랑을 나눠주었다.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처럼, 포르투갈의 정겨운 갈매기들처럼. 그들이 나눠준 사랑은 각각의 매력을 발산하는 특별한 사랑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대지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가 일컫는 사랑은 파비오들이 주는 사랑처럼 따스하고 정겨울 수 있을까? 나는 파비오들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나눈 사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