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어릴 때는 이 말을 믿기 힘들었다. 호랑이 굴에 갇힌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한데, 그 상황에서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있을까? 정신을 가다듬는다 해도, 말이 안 통하는 호랑이로부터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이 비유적인 표현이 나에게 아로새겨지고 있다. 오늘은 그 경험들 중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 후, 살아서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있다. 각자가 갇힌 호랑이 굴의 깊이와 호랑이의 공격성이 다르겠지만, 대게는 이 과정의 흐름을 따르는 듯하다.
첫 번째, 무인지 상태로 입굴
두 번째, 까막눈 상태로 상황 파악
세 번째, 호랑이굴 인지 후, 절망과 두려움
네 번째, 생존법 모색 및 실천
마지막, 출굴
나는 정적인 치열함이 감도는 곳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재작년 여름, 다른 학교로부터 해외 파견 연구를 함께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나는 6 개월 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파견 연구를 하게 됐다. 그렇게 파견 초기, 나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게 된다.
☘️ 무인지 상태로 입굴
영국으로 떠나기 전, 파견 첫 2주 동안 머무를 임시 숙소를 구했다. 장기로 머물 숙소는 직접 집을 둘러본 후 결정하고 싶었고, 2주 정도면 장기 숙소를 찾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임시 숙소를 예약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세 가지가 있다. 숙박 요금, 파견지와의 거리, 그리고 치안. 파견지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숙박 요금이 저렴한 Bottisham(보티샴)이라는 지역에 임시 숙소 (정확히는 숙소의 방 하나)를 잡았다. 숙소 주인이 여성 분이셨고, 여성 전용 숙소였기에 여자인 내가 머물기에는 더 편하고 안전해 보였다. 막상 숙소에 도착해 보니, 두 딸과 한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숙소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사전에 알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두려움 80% 설렘 20% 마음을 안고 간 타국에서 잘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 까막눈 상태로 상황 파악
보티샴에서 파견지까지는 시내버스로 40분 정도 걸렸다. 환승하는 시간을 포함하면 한 시간 정도는 걸렸던 거 같다. 보티샴을 지나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번 있었는데, 그나마도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겨서 오기 일쑤였다. 케임브리지에서 돌아오는 마지막 버스는 저녁 일곱 시 즈음에 끊겼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았다. 막차가 끊겼을 때 택시를 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보티샴이 외딴곳이라 택시 기사님들께서 꺼리시는 듯했다. 생각보다 더 외딴 지역이라는 것을 체감했지만, 임시 숙소니 조금만 버텨보기로 했다.
주방은 숙소 주인 가족들과 함께 사용했다. 이전 투숙객이 작성한 후기에서 주방 사용시간과 관련한 불만 사항을 봤기에, 확실히 규칙을 알고 싶어 주방 사용시간이나 다른 주의할 사항들을 주인들에게 물어봤다. 숙소 여주인이었던 다이애나는 딱히 정해진 규칙은 없으니, 그냥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퇴근 후, 6-7시쯤 저녁을 먹기 위해 주방을 간 날이었다. 가족들이 저녁 준비로 한창 바빴다. 나에게는 자신들의 식사 시간이니 나중에 요리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밥을 다 먹고 난 후에야 밥을 해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늦게 퇴근을 한 후, 밤 8시가 지나 주방에서 밥을 해 먹은 적이 있다. 밥을 다 먹고 방으로 돌아오니 남자 주인으로부터 메시지가 와있었다. 늦은 밤에는 밥을 안 먹었으면 좋겠고, 8시 이전에 끝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였다. 숙소 주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서러운 마음이 컸다. 특히 숙소를 운영하는 거고, 정해진 규칙이 없었는데 없던 규칙들을 하나씩 만드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기댈 곳 없는 타국에서 이미 지치는 일들이 많았기에,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내가 불편함을 감수해 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나는 숙소의 여주인이었던 다이애나를 친구로서 좋아했고 응원했다. 내가 퇴근을 해 숙소로 돌아오면, 다이애나는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결혼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두 딸로 인해 힘들었던 부분을 말해줬다. 다이애나의 모든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순 없었지만, 그 힘든 마음들을 알아주고 다독거려주고 싶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다이애나의 생각을 들을 때면 인생을 먼저 살아본 언니가 해주는 조언처럼 느껴져 따뜻해졌다.
☘️ 호랑이굴 인지 후, 절망과 두려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김없이 다이애나는 부엌에 앉아 있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나에게 다소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다이애나는 자연스레 자신의 부부가 이미 이혼한 상태이고, 자녀들 문제로 지금은 한 집에 살고 있다 했다. 그리고 두 딸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두 딸을 데리고 고향인 이탈리아로 떠날 계획이라 했다. 당장 내일 떠날 거고, 며칠 뒤에 돌아올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다이애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남자 주인과 둘이서만 그 집에 있게 된 상황이었다. 안전한 숙소를 찾던 나에게 , 그 상황은 더없이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다이애나의 힘든 상황이 나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고, 며칠만 견디면 다이애나가 다시 올 거라는 믿음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남자 주인의 감정적인 언행에 나는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한 번은 급하게 필요했던 자전거 손전등과 우비들을 택배로 주문했다. 메시지를 통해 남자 주인분께 양해를 구했는데, 공격적인 메시지가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숙소 주인 중에서는 투숙객이 택배 배달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인 입장에서 민감했을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해 먼저 사과를 건넸다. 퇴근 후, 얼굴을 마주하기 무서웠지만 직접 사과를 한번 더 하고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에, 남자 주인이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예상과 다르게, 남자 주인은 택배 주문을 해도 괜찮고, 내 집인 양 편하게 있어라며 활짝 웃는 얼굴로 대했다. 이내 나는 그 사람의 숨은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이애나와 자신의 딸들은 이탈리아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이 집을 곧 팔고 이사를 갈 거라고 했다. 집이 팔리기 전까지는 다른 숙소 구하는 데 에너지 쏟지 말고, 더 머물러도 괜찮다고 했다. 서로 좋은 거래인 거 같다고 말하며 웃는 그 사람의 얼굴과 큰 몸집. 자신의 감정과 이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버리는 그 사람의 말과 태도. 더군다나 돌아올 줄 알았던 다이애나가 안 돌아온다는 사실이 나를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다. 애써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해줘서 고맙다.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라고 말한 뒤, 내가 머무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없이 새벽까지 울었다.
방 빼고는 모든 공간을 그 남자 주인과 공유해야 했기에, 화장실과 샤워실도 가지 못했다. 한국에 있던 친구가 나와 통화하며 그 두렵고 서러운 시간들을 함께 해줬다. 당장이라도 그 숙소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에, 친구와 함께 탈출 전략도 짰다. 알 수 없는 그 주인의 감정선 때문에 최대한 몰래 숙소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군대에서 배운 전술에 능한 친구 덕분에, 그럴듯한 탈출 전략을 짤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임시 숙소의 숙박 가격이 너무 비싸, 그 전략은 결국 사용하지 못했다.
☘️ 생존법 모색 및 실천
하룻밤을 눈물로 지새우니, 곧 아침이 밝아왔다. 감정을 쏟아낸 덕분인지 정신이 맑아지고, 차분함이 찾아왔다. 숙소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갈 방법은 빨리 장기 숙소를 구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이트들을 뒤져가며 집 뷰잉(월세 계약을 하기 전에 미리 집을 둘러보는 과정) 신청 메일을 여기저기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케임브리지 지도에 뷰잉 할 집들을 표시해 가며, 집을 구하기 위한 경로를 짰다. 또한 장기 숙소에서 고려해야 할 여러 목록들과 각 집들에 대한 정보들을 정리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오는 주말 동안, 중고로 산 자전거를 타고 케임브리지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을 보기 시작했다. 끼니도 거른 채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집을 보러 다녔다.
집주인들 중에는 약속 시간 바로 전에 뷰잉을 취소하거나 시간을 변경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약속 시간에 늦는 경우도 있었다. 타국에서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내 마음은 더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다 나에게 적합한 집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집주인분도 선량한 분이셨기에, 그 집으로 계약을 맺고 다가오는 평일에 바로 이사날짜를 잡았다.
☘️ 출굴
이제 임시 숙소 주인 몰래 집을 옮기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먼저 집주인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을 파악했다. 집이 비어있는 시간 동안 짐을 옮겨, 새로운 숙소로 이사를 했다. 새로운 숙소로 이동하니 내 마음속에 한줄기 햇살이 내리는 것처럼 따뜻한 안정감을 느꼈다. 이제 임시 숙소에서 남은 숙박 기간에 해당하는 돈을 환불받는 일만 남았다. 임시 숙소는 특정 숙소 예약 사이트를 통해서 구한 것인데, 신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떠올랐고, 그녀와 쌓은 정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결국 남자 주인에게 메시지를 해 남은 기간 동안의 숙박요금만 환불받고 마무리를 했다.
나에게는 보티샴 임시 숙소가 호랑이 굴이었다. 어릴 때 나는 호랑이 굴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다른 형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때가 찾아온다. 그리고 지금은 호랑이 굴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보티샴에서 내가 무사히 빠져나온 것처럼, 나는 앞으로도 같은 과정을 겪으며 모르고 들어간, 또는 알지만 들어간 호랑이 굴에서 지혜롭게 빠져나올 수 있는 정신력을 키우려 한다.
호랑이 굴에 있어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