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서울국제마라톤] Dead Point와 Wall에서 생각한 것들
아침 8시 30분경에 출발점을 통과한 후3시간이 넘어 30km 지점에 이르렀다. 이제부터는 한발한발이 새로운 기록이다. 대회 전까지 30km 이상을 달려본 적이 없었다. 듣고, 찾아보며 알게 된 마라톤의 사점(Dead Point, 이하 DP)까진 4~5km 남은 듯했다. 무릎 아래쪽 근육통 탓에 반장님이 일러준 6.20''페이스로 왔지만 20km를 넘어서도 순탄했기에 DP는 없을지 모르겠다고 살짝 기대했다.
DP는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35km를 지날 무렵부터 다리가 묵직해지더니, 한발 나아가고 디딜 때마다 '걸어라, 멈춰라'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왔다. 주자에서 보행자로, 보행자에서 몸풀기 운동으로 옮겨간 배번들은 '너도 우리처럼 하면 편하다'라고 시위했다.
레이스를 중단해도 누구도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아픈 상태로 뛰기 시작했고, 뛰다 보니 아팠어요."라고 하면 그만이다. 짧은 답변이지만, 경험 많은 마라톤의 선배들이 이해 못 할 말이 아니기에 어쩌면 애썼다는 위로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여느 대화들처럼 나에게 온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는 각자의 경험으로 이어질 테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자신의 경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타인의 사정은 풍경이 된다.
더구나 마라톤은 촘촘한 연대인 듯 출발선에 모여있지만, 주자와 주자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레이스가 계속될수록, 대회 경험이 늘어날수록 자신과의 결합이 더 강고해지는 듯했다. 그래서 한 명의 중도포기 변명쯤은 순간의 무난한 이야기로 사위어갈 뿐이다. 기록지에 좀 남겠지만 여느 일처럼 여러 경우 중에 하나로 스스로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별 문제될 것도 없다. 살아오면서 무난한 변명으로 힘든 순간에 포기하거나 중단하고, 적당히 스스로를 합리화해 본 적이 많이 있기에, 풀코스 완주 포기가 더해진다고 해서 삶이 더 무거워질 것 같지도 않았다.
달린다고 보기 어려운 속도로 37km를 지났다. 그러던 중 완주자에게 주어지는 바람막이는 받고 싶단 생각과 여기까지 달려온 시간도 아까웠다. 문득 "내 삶의 한 부분에 DP를 넘어 더 이상 달려도 되지 않을 지점까지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도 있을까"라는 물음이 다가왔다. 어떤 계기로 이런 목소리가 들렸는지 알 수 없다.
비록 6.20'' 페이스지만 5m가 되는 근육테이프 한 통을 종아리, 무릎, 허벅지에 덕지덕지 붙이고, 무릎 보호대까지 하며 여기까지 왔다. 어제보다 부상이 더 심해진다면 상당기간 달리지 못할 것이고, 더 나쁜 경우라면 오늘 풀코스 대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불안으로 이어졌다. 불안은 사람을 움츠리게도 하지만 나아가게 하는 힘도 있다. 다시 한발 한발 달렸다. "못했던 게 아니라 안 해본 것이다"라는 문구도 보였다.
안 해본 일은 불편하다. 의지가 생겼다고 해서 고통이 잊어지는 크고 놀라운 환희는 없었다. 잠실역에서 주 경기장까지는 속도와 거리 파악이 어려웠다. 앞사람 뒤만 보고 달리는 편을 택했다. 주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늘이 열리는 감동이 있다고 들었으나, 한발 한발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거리 기록과 힘듦이 비례하여 쌓였다. 마지막 트랙은 탄천종합운동장의 같은 거리보다 몇 배는 길게 느껴졌다.
결국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되는 선을 넘었다.
첫 42.195km가 끝났다. 22년 1월, 5km를 뛰고 어지러워 주저앉았던 경험이 확장되어 풀코스를 완주했다. 수천 명의 완주자 가운데 한 명이겠지만, 나에겐 경험의 전부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완주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 끝이 명확하기에 그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느리지만 그래도 끝까지 뛰게 했다.
다시 달리지 않아도 되는 선은 다시 달리기 위한 준비선으로 바뀌었다. 가을 대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1km부터 다시 쌓아 올릴 것이다. 5km, 10km, 하프, 결승선까지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23.04.08
덧붙이는 글
1. 처음 쓴 메모의 시작은 "달리기는 단순하지 않다"로 시작했다. 싱글렛, 반바지, 운동화에 몇 가지 아이템만 있으면 달리는 데는 충분하지만, 글도 디자인도 그렇듯 단순한 외형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준비와 고려들이 있다.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는 주자들의 모습을 보며, 예술 명장들의 숭고함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하루하루 훈련이 의식 같았다.
2. 대회 참가 후기를 정리하기까지 20일가량 걸렸다. 대회 도중 레이스 운영에 힘들어하던 클럽 멤버의 모습과 그분이 대회 후 단체대화방에 남긴 "여러 가지로 저 스스로 너무너무 이해가 안 가는 Finish였기에 지금도 온몸의 상태가 비정상이네요"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라톤에 임하는 주자들은 저마다 목표를 다진다. 그 목표는 단순히 기록이나, 완주 여부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