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역 퇴근길

기대, 그리고 기회,

by JJ

ㅇ 코로나가 극성이던 때와 달리 요즘 퇴근길 신분당선은 대기 줄이 길다. 1~2대 정도는 보내야 겨우 탄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열차가 곧 들어온다는 시각 사인을 보면 교통카드를 찍고 바삐 달려 내려간다. 승강장에서 짧은 줄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결론은 매번 같다.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은 판교역이 한 번에 나를 태워줄 리 만무하다.


다시 전광판을 보니 청계산입구역에서 막 한대가 출발했다. 7분 후 나는 몸을 굽히고 가방을 움켜쥐었을 때 열차에 발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일은 좀 더 눈치 있게 움직여 한 번에 타보겠다고 다짐한다


ㅇ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형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회사가 이럴 수 있지. 저번에 분명 1년만 고생하면 임원 승진시켜 줄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이번에 나 빠졌다. 내가 헛된 기대를 했나 봐. 이럴 거였으면 그 부서에 안 갔을 거야" 형은 임원이 되고 싶어 했다. 경영진의 요청에 따라 지역 본부로 이동했다. 1년 전 이 즈음, 형은 경영진이 자신을 믿는다며 뿌듯해했고, 촌놈 출세하게 될 거 같다고 했다. 아이들의 입시 때문에 이사도 못하고 하루에 꼬박 4시간씩 출퇴근을 해야 했지만 기회가 왔는데 차버릴 수 없다고 했다.


회사(의 높은 임원)는 다시 형에게 1년 후를 이야기했다. 신분당선은 더디 왔고, 한참을 토로하던 형의 목소리에는 어느샌가 그래도 '기대'와 '기회'라는 말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년에는 뭔가 좋은 결과 있겠지. 내가 아이들 잘 키우고 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사는 거니까 괜찮아. 감사하며 살아야지. 내년에는 나 임원승진하면 파티하자. 말이 길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라" 인사말을 할 사이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아마도 집 앞에 다다른 모양이다.


ㅇ 정자역과 미금역을 지나며 승객들이 우르르 내렸고 전철 내부 온도도 조금 내려가는 듯했다. 밀도가 줄자 단어들이 공간을 채운다. 단어들은 몇 음절정도지만 그 속내는 깊고 오묘하다.


'기회를 만들어보자'라고 말할 땐 대개 실패했거나 수세에 몰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격려 차원이 강하기에 '기회'라는 단어의 표피에는 능동적인 어감이 잘 안 보인다. 기회는 주어진 것이고, 주어졌을 때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의 밖"에서 시작되는 단어이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또 다르다.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진 않는다. 그 기회를 잡을 만한 사람들, 일정 수준 이상이거나 일정 조건 이상이어야 기회가 부여된다. 기회를 위해선 능동적인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기회를 움켜 잡았을 때 펼쳐질 모습을 기대한다. 지하철을 타면, 아이들과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임원이 되면 더 많은 보수와 사회적 평판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다. '기대'라는 말에는 '기쁨과 만족'을 품고 있다.


그래서 기회는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기회는 사동적이다. 신분당선의 전광판에 곧 열차가 들어온다는 것을 발견하고 뛰어가는 모습처럼, 지방 본부로 가면 임원 승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했을 때 기꺼이 4시간의 출퇴근을 감수했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생각하지도 못한 시기에 기회가 오기도 한다. 화요일 오후 6시에 퇴근하며 1~2대 정도 보내고 타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하철 전광판 사인도 보지 않고 승강장으로 걸어왔는데 마침 들어오는 신분당선을 타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다. 교통카드를 찍는 것으로 우린 지하철을 탈 준비를 해왔다.


ㅇ 주일 예배 시간, 목사님의 설교 말씀 사이로 그날 형의 전화를 받으며 판교역을 내려가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회를 기다리고, 기회를 찾고, 기대하는 모습, 기회와 기대를 통해 누군가는 동기부여를 하고(받고), 혹은 이용하기도 한다. 기회와 기대로 기망하고 절망을 선사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기회 근처에서 기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 아닐까 싶다.


지하철 한 대를 보내야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가는 시간이기에 즐거웠다. 형은 1년을 더 지역에서 보내야 하지만, 아무 기대 없는 직장 생활보다는 더 좋다고 했다. 여전히 우리에겐 기회가 오고 있고, 그 기회를 움켜 잡음으로 인해 얻을 모습들을 기대하며 현재를 이겨내기도 한다.


우연처럼 다가온 기회라고 해도, 기회는 기회이기에 흐름에 맡겨봐도 될 정도로 우리는 살아왔다. 설령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서 기대할 게 없다고 해도 좌절할 필요도 없다. 다른 기회가 올 것이고 다른 기회 속에 다른 기대도 생기니까.





*나에게 쓰는 편지 :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전진은 아니다. 머무름도 나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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