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기억은 책 속의 장면들이다.
요즘 세대에선 빠른 편인 스물여덟에 결혼했다. 친구 중에 가장 먼저 했으니, 당시에도 빠른 편이었다.
연애 기간이 짧았던 남편과 1년은 신혼생활을 즐기고자 했는데 결혼 4개월 만에 임신! 테스트기 두 줄을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차오름을 느꼈다.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나도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좋은 부모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롤모델은 항상 엄마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늘 읽는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 어버이날 선물로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편지와 함께 드린 기억도 선명하다.
그보다 더 오래된 내 최초의 기억은 책 속의 장면들이다.
유아기 시절 좋아했던 책인 프뢰벨의 글자 없는 그림책 <이야기해보셔요>의 모든 장면이 신기할 정도로 생생하다. 장면만 기억 속에 둥둥 떠다니고 제목도 몰랐는데 아이를 키우며 중고 책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보물 상자를 발견한 것처럼 아이보다 더 신이 나서 열 권의 책을 보고 또 봤다.
마찬가지로 제목은 모르지만, 또렷이 기억나는 책의 한 장면이 있다.
옛이야기였는데, 주인 영감이 머슴에게 장에 나가 배를 사 오라고 시키면서 꼭 맛을 보고 사 와야 한다고 호통을 치며 말한다. 머슴이 배를 사 왔는데, 모든 배가 한 입씩 베어 물어져 있는 것을 보고 영감이 노발대발하자 “맛을 보고 사 오라면서요~”하며 태평하던 머슴의 모습. 장 바닥에 앉아 배를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아직도 배를 먹을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오른다.
책의 기억들은 오랜 세월 잊히지 않고 불쑥불쑥 떠오른다.
아이에게도 그런 기억을 물려주고 싶었다. 책으로 키우면 될 것 같았다.
임신 초기부터 육아서를 읽기 시작했고, 친정에 남아있는 세계 명작 그림책들을 가져와 태교로 읽어주었다. 남편과 함께한 책 읽어주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초등학생이 된 딸들은 아직도 어릴 때 함께 읽었던 그림책을 꺼내본다.
그럼에도 책은 계속 늘어가고 공간은 한계가 있기에 정말 좋아하는 책들만 남기고 정리했다.
정리하면서도 <이야기해보셔요>처럼 아이들 기억 속을 유영하는 책을 섣불리 떠나보낸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말처럼 책도 정말 그러하다.
지우지수의 기억 속 첫 장면도 나처럼 책의 한 장면이 될까? 그건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함께 봤던 그림책의 수많은 장면과 감정은 언제나 기억의 파편 속에 존재할 것이다.
책을 잔뜩 쌓아두고 읽던 날들의 온기와 낮은 음성과 숨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책 냄새, 다채로운 색감, 달빛 조명 아래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했던 따뜻한 추억들을 온몸의 감각으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