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퇴근길 휴대폰 충전기의 케이블을 사러 집 근처 삼성 서비스 센터에 들렀다. 이렇게도 단자에 꽂아보고 저렇게도 돌려봐도 충전이 되지 않는 선을 오후에 책상 옆 쓰레기통에 넣은 뒤 충전을 못해 배터리는 방전됐다.미련 없을 만큼 완벽히 망가지기 전까지 무언가를 사지 않는다.
C-타입 케이블을 사고 나오는 길, 리빙 앤 홈 매장의 봄맞이 세일이 눈에 밟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물건은 언젠가 깨 먹고 다시 사지 않은 밥공기. 새 수건을 산 지도 꽤 됐다. 대나무로 만들었다는 보드라운 남색 수건 세트도 집었다. 두 가지만 골라 계산대로 갔다. 쇼핑의 마지막을 장식할 '마약'수면 베개를 9900원에 팔고 있었다.
견본품을 만지며 내 안에서 케이블, 밥그릇을 집을 때와는 달리 저항감이 솟았다. 케이블, 그릇과 달리 내 머리맡에는 베개가 두 개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잠을 잘 못 잤잖아.' 뜬금없이 베개가 눈에 들어온 이유를 분석하고 나를 설득하고 나서야 계산을 마쳤다. '굳이 사야 해? 나는 이 소비를 책임질 수 있니?' 1인분의 소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며 플렉스(flex)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지난해 11월 다녀온 여수
나의 소비 브레이크는 절약, 미니멀리즘, 친환경 등 각양각색의 책임감이 오랫동안 축적된 결과다. 안 사고 덜 결제하는 이 간단한 기술이 돈 아끼기, 내 삶을 간단하게 만들어 정돈하기, 지구에 남을 쓰레기 줄이기 등에 가장 강력한 효과가 있다고 확신하는 편이다.
먼저 절약. 다섯 가족이 함께 사는 외벌이 가정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만든 사람도 있는데, 고치는 게 뭐가 어렵겠느냐'며 고장 난 가전과 보일러를 멀쩡하게 부활시키는 맥가이버였다. 물, 전기 같은 에너지 절약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몸에 밴 습관이었다. 옷과 책도 많이 물려받았는데, 요즘도 필요한 상품을 사기 전 당근 마켓에는 없는지 먼저 검색한다.
그리고 미니멀리즘. 스무 살 타지에 있는 대학으로 독립하며 이 기숙사에서, 저 기숙사로 짧게는 1분기마다 혼자 짐을 싸고 부치고 옮겨 다녔다. 생각 없이 삶에 들인 물건의 무게에 질려버렸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너풀너풀한 여신 핏 스판 원피스와 언젠가 신을 것이라며 세일할 때 산 앵클부츠는 이삿짐 쌀 때만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책장에 흐뭇하게 열 맞춰 꽂아둔 종이책들을 옮길 땐 허리가 아팠다. 프랑스 교환학생 시절,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방에 욕심껏 가득 담은 장바구니를 지고 올라갈 때는 결심했다. 음식이든, 책이든 내 두 팔로 옮길 수 있는 만큼만 소비하고 쌓아놓자고. 내가 정한 소비의 무게다.
마지막으로 친환경. 요즘 어린 친구들이 갖는 기후변화에 대한 두려움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대학 때 그린캠퍼스 활동을 했고, 꾸준히 기후변화 그룹에 껴 뉴스를 전해 듣는 등 지구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감은 갖고 있다. 가끔 내가 먹고 쓰는 것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지 생각이 들 때면 오싹하기까지 한다. 음식이 맛있고 자리가 즐거워서 신나게 먹고 싶을 때, '굳이 이렇게까지 많이 먹어야 해?'라고 생각한다. 공짜로 에코백을 준다는 제안에 '저는 이미 에코백이 많아서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나 이미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옷과 물건이 있다면 굳이 사지 않기에, 요리를 꽤 하는 내 부엌에는 전기밥솥이 들어온 것도 비교적 최근이며, 여전히 뒤집개조차 없다. 부모님은 옷도 몇 벌 없고 무엇 하나 쉽게 사는 일 없는 딸을 보며 '좀 사 입고 사 써라!'라고 자주 이야기하신다. 넘칠 만큼 못 사주고 못 먹인 탓에, 가난의 습관이 들었다며 자책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적은 물건에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나 자신이 아직은 만족스럽다. 적은 돈으로도 잘 살 수 있기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현재에 대한 집착도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 가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 마음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