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컬트라 불리는 장르의 영화는 즐겨 찾지 않는다. 악령과 악마의 등장은 한여름에도 오소소 소름을 돋게 해서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보게 되지 않는다. 근래에 <검은 수녀들>을 보고 나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가 이런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구나.'하고.
애니메이션이란 매체도 마찬가지다. 인기 있는 작품들은 보는 편이지만 어릴 때 TV의 만화영화와 그 외에 몇몇 유명한 할리우드와 일본 애니메이션, 그리고 내가 특별히 사랑한 <빨간 머리 앤>과 <베르사유의 장미>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열정적으로 찾아서 챙겨보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그 둘을 잘은 모른다. 그런데 그 둘이 합쳐진 작품이 등장했다. 20세기 말 등장해 수많은 마니아를 열광하게 했던 《퇴마록》이다. 처음 보는 한국형 오컬트 소설에 빠져들었었고 원작 소설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었다. 한 권씩 차례로 출간됐었기 때문에 다음 권이 나올 날만 기다리곤 했었다. 퇴마록의 팬들이라면 책이 나올 때의 그 기분을 똑같이 느껴봤을 것이다. 그 기다림과 설렘, 흥분, 기대감 등을 말이다.
추상미와 신현준 등이 주인공 역을 연기했었던 잊힌 영화가 있다. <퇴마록>은 오래전 이미 영화화가 됐었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망했다. 너무 별로여서였을까 심지어 기억도 잘 안 난다. 《퇴마록》의 팬이라면 실사영화가 왜 망했는지 굳이 말을 얹지 않고도 알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엉망진창인 영화였다. 캐릭터들의 매력도, 실사로 구현된 영상도 원작 소설의 그 특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원작 소설까지 망쳐진 기분이었다.
《퇴마록》이 망한 영화로 남는 것이 싫어 팬으로서 다시 영화화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퇴마록》의 실사영화가 혹평을 받은 여파 때문인지 그 후로 오랫동안 영화화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곧 상영할 거라는 소식을 접했다. 실사 영화화됐으면 하는 나의 바람에 살짝 실망하기도 했으나 이런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다려오던 《퇴마록》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반가움에 묻혔다.
원작 소설을 기다렸을 때의 그 느낌을 다시 찾았다. 오래간만에 정말 신나게 극장에 달려갔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 같은 반가운 마음이었다. 원작의 구체적인 이야기도 다 잊어버릴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선이 악을 이기는 통쾌함은 여전했다. 원작의 처음 부분만이 영화화되긴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의 현암, 승희, 박 신부, 준후가 살아 돌아왔다.
애니메이션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꽤 괜찮은 애니메이션이었다. 몇몇 장면들은 그림이 아니라 마치 진짜처럼 보였다. 특히 화재 장면은 실제로 불이 난 것처럼 실감이 났다. 대체로 원작 그대로여서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격투 장면도 훌륭했다.
실사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영화화한 것은 매우 똑똑한 선택으로 보인다. 악을 퇴치하는 용감한 주인공들이 있었고 악과 싸우는 장면은 오히려 실사로 구현하는 것보다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기에 더 적합해 보이기도 했다. 12세 이상 관람가라서 더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반면에 실사영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컬트 무비만의 무서운 분위기와 느낌을 더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감상이다. 내 경우에는 <검은 수녀들>과 비교해도 작품의 만듦새와는 별개로 <검은 수녀들>이 훨씬 무섭게 느껴졌다. 아마도 실사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아닌가 싶다.
잠깐 등장인물들을 언급해 보자면, 내 상상 속의 박 신부는 저렇게 근육질이 아니었는데 전투력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현암은 너무 젋어 보이고 승희는 너무 짧게 등장한다. 승희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별로 없어서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관객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후속편이 제작된다면 각각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더해져 더 재미있어질 것이다. 퇴마록을 사랑하는 팬심을 더해 2편이 꼭 제작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다행히 이번 작품이 잘되면 후속작도 계속 제작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섞인 소식도 들려왔다.
집에 와서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퇴마록》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이렇게 긴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내가 제작자가 아닌데도 이번 작품이 흥행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만 가득하다. 오랜 팬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좋은 작품이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계기로 한국 애니메이션이 잘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우리에게는 <뽀로로>와 <캐치 티니핑> 같은 애니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한국은 오컬트 같은 장르 애니도 잘 만든다고. 국뽕이라 할지라도 이번 퇴마록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고 K-POP이나 K-드라마, K-영화뿐만 아니라 K-오컬트 애니메이션도 세계에 널리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애니메이션의 인기와 CG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언젠가는 멋진 배우들이 등장한 현실 같은 실사영화도 만들어지길 하는 개인적인 바람도 가져본다. <퇴마록>이 한 편으로 끝나지 않고 긴 원작 소설 전부 시리즈로 만들어져서 오래도록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원작 소설의 인기까지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