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by RNJ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말이 재미난 이유는 혀 짧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톡톡 튀는 리듬감 때문이기도 하다만, 어른은 이 상황에서 결코 사용하지 을 말을 용케 상황에 끼워 맞춰 내뱉는 기똥차고 거침없는 상상력 덕이기도 하다. 이전의 경험과 눈앞의 상황의 유사점을 인식한 아이는 자신감이 한껏 버무려진 기억 속의 문장을 툭- 내뱉는다. 그 찰나의 순간, 상대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한 고려는 끼어들 틈이 없다.


잠깐만요!


"멈춰! 잠깐! 그만! 안돼!"


스스로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인간이라 자부했던 부모조차 제 아이 앞에서는 융통성이라곤 없는 감독관이자 검열관이 되고 만다. 이러한 이유로 아이는 상대의 행동을 제약하는 명령문을 꽤나 빠르게 제 것으로 습득한다. 그렇게 친구와 선생님, 부모에게 명령을 내리는 하극상 전문 꼬마 장군이 탄생한다. 이는 거침없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지위를 한동안은 즐겁게 누리게 될 것이다. 말을 알아먹어야 훈육이란 걸 할 수 있으니 원....


오래간만에 날씨가 따듯해진 어느 주말, 우리 가족은 새와 동물을 구경할 수 있는 작은 동물원을 향해 출발했다. 겨울을 맞아 똥똥하게 털이 오른 참새나 제주도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새까만 까마귀, 실외기에 간이-둥지를 지으려 엄마와 전쟁을 벌이는 비둘기만 보던 아이의 눈에 쪼르륵 손에 안기는 알록달록한 앵무새는 뭐랄까, 사랑스러운 인형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앵무새의 목적이 친밀감을 키우기 위한 교감이라기보다는, 아빠가 자신의 손바닥에 모이를 올려놓아 벌어진 일임을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이가 다 떨어지자, 앵무새들의 그야말로 '썽'을 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이의 기억 속에 숨겨져 있던 하나의 씬이, 의식의 수면 위로 빠르게 부상한다. 제 영역을 두고 살벌하게 싸우던 까치와 까마귀, 이리저리 흩날리던 깃털을! 아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의적이기 짝이 없던 앵무새가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화풀이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는지....


"잠깐만요! 잠깐만요!"


부모에게도 잘하지 않는 존댓말이 봇물처럼 튀어나왔음에도, 아이는 앵무새에게 손을 아주 살짝- 깨물리고 말았다. 이건 기억 속에 없지만 익숙한 고통이다, 아이는 펑펑 울었고 아마 몇 가지 깨달음도 얻었을 것이다. 동물은 말이 안 통하는 존재이고 어른들을 쉬이 무장해제 시키던 존댓말차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 아이의 내부에서 언제나 우세했던, 타자를 향해 우호 지향적이었던 유전자가 야생의 쓴 맛을 한 소금, 제대로 맛본 날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아이는 새가 앉아 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의, 세상의 모든 나무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는 멀찍이 둘러가야 한다는 진리를, 기억 속에 단단히 새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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