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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거와 오도바이

by R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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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살다 온 와이프가 나의 콩글리시와 요상한 영어 발음을 듣고 박장대소할 때, 영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아이가 그녀를 따라 아비를 킬킬 비웃었다. 그때부터 제대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확한' 말에 대한 아빠의 집착에 말이다.


디거와 오도바이


KakaoTalk_20251117_142406628.jpg 아이의 단잠을 깨우던 포클레인


포클레인.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표적인 콩글리시지만 그렇다고 Excavator나 Digger가 혓바닥에 착 달라붙어 곧장 뛰쳐나오지는 않는다(심지어 브런치 맞춤법 검사조차 포크레인을 포클레인으로 바로잡는다). 괜히 젠체하는 별난 사람 같달까. 그럼에도 다음 세대를 살아갈 아이에겐 정확한 단어를 알려주기로 했다.


"디거! 저건 디거야!"


이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주입식 교육을 했고, 이후에 아이는 굴착기를 볼 때마다 "디거! 디거!"라며 곧장 잘 따라 하곤 했다. 그러나...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포클레인이라는 말을 기어코 익혀오고 말았다. 배수관 공사를 하느라 집 근처 도로에 온갖 중장비들이 모여있는데 아이는 이를 보고


"포크레인! 뽀크레인!"


이렇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 내에서 합의된, 하나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누구나 "벌거벗은 임금님!"이라 외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조차 재플리시에서 기원한 캠핑카, 다이어트, 굿즈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지 않은가. 이젠 하나의 대상이 여러 가지 이름이 있을 수 있음을 조금씩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면 아이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입에 쩍쩍 달라붙는 하나의 단어를 선택한다.


KakaoTalk_20251117_142306636.jpg 다이하츠 미젯


제주도 구좌읍엔 지브리 공식 기념품 가게인 '도토리 숲'이 있는데 이곳에서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은 굿즈는 바로 <이웃집 토토로> 인트로에 등장하는 귀여운 삼륜트럭이었다. 토토로, 고양이 버스, 가오나시, 키키와 지지가 누리고 있는 범세계적인 인기는 두 돌 아이의 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고 자동차를 향한 아이의 한결같은 사랑을 바라보는, 최애 장난감 3순위로 밀려나 버린 아버지의 마음만 더욱 애달파졌을 뿐이다.


아이는 자신이 고른 기념품이 탈 것의 한 종류임을 인지했지만 바퀴가 세 개인 자동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머리를 굴렸고 나름의 이름을 찾아냈다. 아마 아이는 이런 방식으로 추론하지 않았을까?


바퀴가 있다 -> 빠방이네? -> 그런데 바퀴가 하나 적다 -> 빠방이가 아니네? -> 나는 바퀴가 적은 빠방과 비슷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 -> 그건 오도바이다.


"오도바이!"


나의 머릿속엔 세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오도바이 -> 모터 사이클 (재플리시를 영어로 바로 잡을 것인가?)
오도바이 -> 삼륜트럭 (형태를 구분 짓는 정확한 표현을 알려줄 것인가?)
오도바이 -> 다이하츠 미젯 (정확한 제품명을 알려줄 것인가?)


나조차도 내가 재수 없는 맞춤법 검사기처럼 구는 이유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숲길을 걷다가 만난 나의 모습에서 아주 오래된 이유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자연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종종 나를 데리고 한적한 시골길을 산책하곤 했었다. 나는 무엇이든 물었고 아버지는 무엇이든 답했다. 아버지는 세상 모든 나무의 이름을 아는 것 같았고, 직접 매미를 잡아 내 손에 쥐어 주셨고 물가에서 도롱뇽 알집을 조심스레 건져주곤 하셨다.


아이와 함께 곶자왈을 걷거나 해변에 나가면 나는 항상 무언가를 조심스레 잡는다. 메뚜기, 방아깨비, 여치, 달팽이, 사마귀, 고동, 소라게, 꽃게.... 자연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아이 또한 자연을 사랑하길 바랐다. 모든 사랑의 시작에는 정확한 이름이 있었고 살결에서 느껴지는 낯선 촉감, 다시 자연에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자연과 친해지는 방법을 조금씩 배울 수 있었다.


아이는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들리면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을 찾는다. 나를 알고있는 누군가 나를 부른다. 아이는 그렇게 타자를 인식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이름을 부를 것이다. 아마 그때에, 바로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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