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정 있는 날

북평오일장

by RNJ


낮잠을 자지 못한 아이는 잔뜩 열이 솟았다. 낯선 도시, 흔들리는 버스, 해제되지 않은 강풍 경보. 버스에 힘겹게 오른 아들과 아빠는 백발의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받았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어르신의 어투가 호의를 지나 협박에 이르자 그 친절한 노기를 이겨낼 수 없었다.


장터로 가시는지, 저마다 배낭 하나씩을 메고 있던 어른들은 잔뜩 심통이 난 아이의 졸린 표정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오일장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에 아이는 쪽잠에 빠져들었고, 버스에서 오랜 친구를 만난 한 아저씨는 나의 무거운 백팩을 손수 들어주셨다.


캐나다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정조 20년에 시작된 북평민속오일장의 초입은 이전에 보아왔던 시장과는 달리 비교적 조용하며 쓸쓸한 느낌까지 들었다. 인파랄 것이 없었던 한적한 시장은 빈대떡과 전병이 산처럼 쌓인 노점 앞에서 슬며시 활력을 내뿜었다. 아이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얼마만의 흥정이었는지! 사장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요란스레 입맛을 다시는 아이 덕에 우린 국수와 빈대떡, 그리고 튀김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들깨 가루가 듬뿍 들어간 국수를 물처럼 들이킬 때, 허겁지겁 오징어 튀김과 빈대떡을 집어먹던 아이의 손가락은 기름이 잔뜩 묻어 제 스스로 반질반질한 빛을 내비쳤다.


음식을 가져다주신 어르신은 엄마 없이 아빠와 떠돌아디니는 두 돌 아이의 씩씩함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셨고, 잠시 후엔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측은함에서 소문이 꽤나 와전이 되었음을 느꼈지만, 머쓱히 웃으며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아이와 함께 있다는 이유로, 아이로 인하여 아빠가 된 덕에 받아온 무수한 정은 갚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행에서 느낀 고단함이, 그들이 짊어지고 있던 일상의 무게에 비할 바가 결코 아니었음에도 리에게 기꺼이 미소와 손길을 나누어주었다.


기력을 회복한 아이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버스를 보며 힘껏 손을 흔들었다. 톰 크루즈가 쓸 법한 선글라스를 낀 기사님은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히 빛나는 건치를 내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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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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