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한 친구가 학교에 외제 샤프를 들고 왔고 아이들은 모여 앉아 따끈따끈한 신상품을 구경했다.
"와 이거 얼마야?"
"5000원. 우리 학교 앞 문방구엔 안 판데!"
"5000원이면 나 한 달 용돈인데?"
"일본 꺼야? 고급져 보인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에선 샤프보단 연필을 쓰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학교에서 연필 사용을 권장했고 샤프를 쓰면 선생님들께 꾸중을 듣곤 했다. 선생님들은 샤프로 글씨를 쓰면 글씨체가 나빠지고 학생들이 사용하기엔 고가의 제품이라는 이유로 연필 사용을 권장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눈치껏 몰래몰래 샤프를 쓰곤 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샤프를 사용하는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하고 싶고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 인간의 재밌는 본성이니깐.
몇 년 후 초등학교엔 '젤리'샤프 열풍이 불었다. 천 원짜리 천오백 원짜리 캐릭터 샤프를 쓰던 아이들의 눈에 오천 원 육천 원을 호가하는 젤리 샤프는 비싸고 편리한 혁신적인 아이템이었다. 받아쓰기와 문제지에 시달리느라 딱딱한 굳은살이 박인 중지와 검지를 폭신하게 눌러주는 그 감촉이란! 남자들이 새로운 차에 열광하고 여자들이 한정판 제품에 열광하듯 아이들 사이에서도 핫한 물건들이 있다. 그때는 젤리 샤프 하나쯤 있어야 인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젤리 샤프를 무척 가지고 싶었지만 내 용돈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금액이었다. 7,000원 8,000원을 모으려면 한동안 불량식품과 오락기를 포기해야 했으니 주머니 사정이 궁한 초등학생에겐 너무나 가혹한 딜레마였다. 나는 1,000원짜리 제도 샤프를 색깔별로 하나씩 사는데 만족했다. 글만 잘 써지면 되니까 뭐.
어느 날, 짝지가 귓속말로 보여줄 것이 있다고 속삭였다. 그 아이는 새로운 물건을 학교에 들고 오면 꼭 나에게 몰래 보여주곤 했다. 짝지는 가방을 조금 열고 나에게 신상 샤프를 보여주었다.
"이쁘지? 이거 만 원짜리야!"
"만원? 엄마한테 졸랐냐?"
"이쁘지 않냐?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솔직히 부러웠다.
짝지는 선심 쓰듯 샤프를 쓰게 해 주었고 손을 착 감싸주는 부드러운 젤리의 촉감에 나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불량식품과 오락기를 잠시 멀리해야겠다고. 얼리어답터(?)인 나의 짝지는 어디 문방구가 샤프 가격이 얼마고, 옆 학교 애들은 00 제품이 유행이라는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는 유행에 뒤쳐지기 싫어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 문방구에 갔다. 나는 고급 샤프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샤프를 앞에 두고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힌 지폐들과 동전이 닳을 정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결국 샤프를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속이 후련했다.
비싼 샤프가 학교에 등장한 이후 도난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학교에 비싼 물건을 가져오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변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을 어떻게 거스르겠는가.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 신상 젤리 샤프가 끊임없이 출시되곤 했다. 나는 덕분에 짝지의 철 지난 젤리 샤프를 선물 받았다.짝지가 오래 사용해 말랑말랑해진 젤리 덕분에 손 아픈 것 하나 없이 필기를 할 수 있어 즐거웠다.
지금은 태블릿피시에 필기를 하고 랩탑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지만, 연필과 샤프로 공부를 했던 우리 세대는 이쁘고 편리한 필기도구가 최대 관심사였다. 손에 편하고 글을 쓸 때 좋은 촉감이 느껴지는 이쁜 필기구에 열광하던 시대. 고가 샤프가 과소비를 부추긴다며 9시 뉴스에 다뤄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스마트폰에 전용 펜슬로 샤프 그림을 그리다 보니 세상이 얼마나 빨리 바뀌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또 어떠한 세상이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