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은 바로 짐을 싸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방을 싸면서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여행을 상상해봅니다. '첫째 날은 00을 가니깐... 여분의 옷도 챙기고, 선글라스가 어디 있지? 또 보자...' 옷도 챙기고, 샌들도 챙기고, 수영복도 챙깁니다. 똑같은 여행지를 향하는 여행객이라 하더라도 가방에는 조금씩 다른 것들을 담곤 합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여행할 때 꼭 필요한 것, 여행을 즐거움을 늘려줄 물건들을 가방에 담곤 하죠. 저도 어디를 가던지 빼먹지 않고 챙기는 저만의 필수품이 있습니다. 바로 책입니다.
언제나 지루한 대기시간
여행과 지루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우리가 바로 옆 동네로 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여행은 항상 길고 지루한 이동시간과 대기시간을 포함합니다. 때론 비행기에서 반나절을 보내야 할 때도 있고, 기차를 놓쳐 다음 기차 시간까지 1~2시간을 멍하니 기다려야 할 때도 있죠. 그런 시간을 대비해 저는 가방에 항상 책을 넣어 다닙니다.
아침마다 책을 읽던 해변의 그늘
독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여행지에서의 독서만큼 집중이 잘되는 독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래사장 야자수 나무 그늘 아래 누워서 독서를 하는것만큼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요? 고요한 산속 캠핑장 해먹에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만큼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요? 독서를 좋아하는 저로써는 책에만 집중할 수 있는 비행기 안이 가장 행복한 곳이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제 친구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살 수 있는 기념품을 여행가방에 넣고 다니는 친구가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 오는 것이 아니라 기념품을 사서 여행지로 간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겠죠.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친구에게 물어봤습니다. 친구는 이런 대답을 하더군요.
여행지에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순간이 있을 거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도움을 받기 마련이죠. 모르는 이들이 길을 찾아주기도 하고, 훌륭한 식당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시원한 물 한잔을 선물 받기도 합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감사의 마음을 돈으로 표현하기 애매한 상황에 우리나라 기념품만큼 특별한 선물도 없다고 합니다. 감사한 마음에 드리는 돈을 거절하는 사람은 많지만,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더군요. 제가 그런 선물을 받아도 환한 미소로 반갑게 받을 것 같습니다. 마음을 마음으로 갚는다. 정말 멋진 마인드인 것 같습니다.
제 친구의 기념품처럼, 저도 비슷한 용도의 물건을 하나 들고 다닙니다. 바로 우리나라 지폐와 동전입니다. 여행지에서 친구를 사귀는 경우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음악과 맥주 한잔이면 모두 친구가 되곤 하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에 자기 나라의 돈과 동전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 나라의 돈과 동전에는 생각보다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외국 화폐를 모으는 것이 취미인 저 같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죠. 각 나라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과 자연풍경에 대한 자랑을 하다 보면(이 순간에는 모두가 애국심이 불타오르곤 합니다), 모두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 수 있습니다. 물론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서로의 설명을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요. 뭐 훌륭한 사람이고, 그 나라에 의미가 있는 공간이겠죠?
안감이 다 닳을 때까지 메고 다니던 나의 여행가방, 나의 동반자
캐리어를 챙기는 사람과 배낭을 챙기는 사람은 여행의 목적과 스타일이 다르고, 컵라면을 몇 개 챙겨가느냐에 따라 입이 짧냐, 짧지 않냐를 짐작할 수 있죠. 드라이기부터 노트북, 카메라 등 온갖 잡동사니를 다 챙기는 사람부터 옷 몇 벌만 들고 가서 그때그때 빨래를 하며 버티는 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빨랫줄을 배낭에 묶어두곤 합니다. 저의 호텔방은 빨랫줄로 인해 꼭 인도 빨래터(?)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을 자랑하곤 합니다. 저는 가방이 무거운 게 너무 싫거든요. 자유롭고 여행을 떠나는 저에게 무거운 짐은 미처 풀어지지 않은 족쇄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저는 친구들의 여행가방을 들여다볼 때, 겉으로는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의 내면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여행 가방만큼 그 사람의 성향과 개성을 잘 드러내 보이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물건들로 가방을 꽉꽉 채우다 넘쳐서 상대방의 공간까지 빌려야 하는 사람이 있고, 항상 여유롭게, 가방을 가볍게 하여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함께 가는 이들의 몫까지 말없이 챙기는 사람도 있고, 면세점 쇼핑을 위해 현지에서 가방을 하나 더 사는 쇼핑 러버들도 있습니다. 여행가방엔 나에게 필요한 것뿐만이 아니라 여행을 함께할 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위한 선물이 담기는 특별한 공간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