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우산 아래에서

by RNJ
같은 우산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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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서울 땅을 밟았다. 기억을 더듬어 9호선 플랫폼을 찾아갔고 지하철이 출발하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에어컨 바람이 말 그대로 콸콸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한동안 지하철 구경할 일이 없었던 제주 이주민은 그제야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대도시 대중교통의 찬 맛이 떠올랐다. 벌벌 떨면서 강남까지 실려가는 도중에 이러다 냉방병에 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너편에 앉은 어르신은 삼베옷을 걷어붙이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몹시 덥거나 춥다고 느꼈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용하는 사람이 워낙 다양하고 많다 보니 조금씩 참고 배려하는 미덕이 필요한데, 그래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통제할 수 없는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 나름 참을만한 일상의 소소 불편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고시원은... 조금 달랐다. 고시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각 호실마다 개별난방과 냉방이 불가능한 곳이 많았다. 에어컨 리모컨이 고시원에서는 하나의 옵션(+ 5~10만 원)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내리지 못하는 설국 열차 꼬리칸에 올라탄 기분?


시원한 바람이 솔솔 흘러나오는 조금 선선한 상태를 좋아하지만 누가 히터를 틀었다고 확 꺼비릴 수가 없었다. 옆방 또는 앞방 사람에게는 오늘이 몹시 추운 하루일지도 모르니.... 천장에서 뜨거운 히터가 콸콸 쏟아지는 날이면 창문에 달라붙어 한 줌의 바람을 구걸하며 잠을 청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곤 했다. 날씨가 점점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두꺼운 털옷을 입고 다니는 아주머니 한분이 계셨다. 모두가 범인 1(?)을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는 사람은 따로 없었다. 5~6명에 이르는 사람이 같은 온도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일부 이해하며 공감하고 있었다. 가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범인 2가 에어컨을 틀어버릴 때가 있었다. 나와 비슷한 심정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음에 반가웠지만 털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머니는 털옷 위에 경량패딩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불평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사실 실내온도는 큰 문제도 아니었다. 위층과 아래층이 층간 소음 문제로 다투었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매스컴에서 참 많이 만날 수 있는데 고시원은 은근히 층간소음으로 싸울 일이 없었다. 바로 무시무시한 벽간 소음이 고시원의 얇디얇은 벽을 죄다 뚫고 다니며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기 때문(뭐여, 어디서 나는 소리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리모컨 누르는 소리, 기침 소리.... 모든 움직임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이리저리 겹치고 공명하여 모두가 소음의 피해자이가 가해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군대를 전역하고 기상 방송을 들을 일이 없을 줄 알았지만 아니 웬걸. 이웃들의 알람소리에 눈이 번쩍번쩍 떠지는 삶을 살게 되었다. 종종 알람을 듣지 못하고 숙면을 취하는 이웃이 있는데, 옆집 사람이 친절하게(?) 문 앞까지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부술 듯이) 깨우는 살가운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갑자기 불어오는 건조한 히터 바람.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젓갈, 청국장, 기름 냄새가 더지면 고시원은 대환장 파티의 향연이 되어버린다. 고시원은 고단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기 힘든 공간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알람 소리를 놓치고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원망하는 일은 다소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사는 곳이 이러한데. 물론 순간적으로 '어떤 놈(=분)이....'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누가 남 들으라고 알람을 설정할까. 해소되지 않는 피로와 쳇바퀴 같은 자신의 삶의 가장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본인일 텐데. 계란을 열심히 먹어서 방음벽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벽 한쪽이라도 덮으려면 1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귀가 조금씩 먹어가는 속도가 더 빠르겠네.


고시원에 살다 보면 분명히 다른 방에 살고 있지만 한 지붕 아래, 한 우산 아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문제는 우산이 조금 작고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것. 조금이라도 공간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다툼이 일어나면 누군가는 완전히 홀딱 젖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했다. 연인과 같이 우산을 쓸 때는 일부러 한쪽 어깨를 하늘에 내어주듯이 이리저리 치이며 조금 젖어간다는 사실이 마냥 불편하고 괴로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불편함을 불편함이라고 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앨리스의 행복 지론(I choose my own feelings. Today, I choose 'happiness')은 언제나 유용했다.


싯다르타와 원효대사의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하겠지만, 다스릴 것은 오직 나의 마음과 행동뿐이라는 사실을 아이러니하게도 집이라는 공간에서 느끼고 말았다. 고시원은 인고의 세월을 필히 약속해 주는 참으로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자발적 배려였는지, 피치 못할 체념이었는지. 상반된 생각이 어색하게 균형을 이룬 채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정의되지 못한 모호한 문장으로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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