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의 Comfort food

마음을 채우는 음식

by RNJ
고시원의 Comfort f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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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영혼을 달래는 음식이 닭고기 수프라면, 한국인의 영혼을 달래는 음식은 바로 김치찌개가 아닐까? 특히 고시원 사람들에게 김치찌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이다. 대부분의 고시원이 김치를 무료로 제공하니 입주와 동시에 김치찌개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갖춰지는 셈. 냉장고에 남은 야채와 참치 캔, 통조림 햄을 그릇에 모두 담아 전자레인지 돌리면 김치찌개 완성! 마이크로파가 뽑아낸 진한 육수와 깊은 풍미에 놀랄만한 맛이 태어난다(기대가 어야 실망도 작은 법이다).


고시원 밥솥에는 항상 따듯한 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고시원에서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일무이한 호사. 가끔 밥을 먹는 사람이 없으면(다들 외식을 하나?) 밥통 보온 시간이 60시간을 훌쩍 넘어서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치찌개는 물렸으니 딱딱한 밥과 김치에 참기름을 버무려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김치국밥, 김치라면, 볶음김치.... 나는 고시원을 나온 이후로 1년 정도는 김치를 사 먹지 않았다.


치솟는 물가에 지갑이 쉽게 닫히는 시대를 살며, 가끔은 밥과 김치만 먹고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이미 혀와 위장이 기름지고 풍미 넘치는 음식 맛을 알아버렸으니 송충이처럼 살기는 틀려 먹었고.... 최저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시준’ 푸드가 탄생하게 되는데, 바 양념과 향신료를 죄다 때려 넣어 한정된 재료의 맛을 최대한 끌어올리는(=감추는) 방법. 연고 없이 정착한 낯선 도시. 주어진 재료 속에서 최선의 레시피를 찾아야 하는 고시원 거주민은 케이준 푸드를 만든 루이지애나 이주민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휴게실이나 식당이 따로 없는 고시원은 각자의 방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혼밥의 백미는 바로 명절. 연휴 첫날 아침, 주방에서 마주친 고시원 사장님은 ‘어, 집에 안 내려갔네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민족 최대의 명절을 앞두고 고시원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사장님과 나의 처지는 어떤 면에서는 일 비슷해 보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나 명절에 맡을 수 있 고소한 기름 냄새는 다른 세상, 다른 민족의 이야기였다. 골목길에 던져 놓는 고수레 음식조차 구경할 수 없는 도심의 음지. 고시원 사람들은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상업지구와 대학가 근처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고시원은 대체로 지역에 기반이 없는 도심 속 이주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교통비, 식비, 시간과 월세를 절약할 수 있는 고시원은 합리적이며 가성비가 좋은 선택지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 합리성을 따지는 기준에는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많은 요소들이 배제되어 있다. 가족, 이웃, 친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지와 응원을 뒤로한 채 떠난 사람들. 내일을 위해 오늘의 불편함을 담담히 묻어버리는 공간.


사람이 기존에 생활하던 공간을 떠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더 좋은 환경을 위해서, 또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어떤 이유였든 간에 새로운 도시에, 수도권에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이 주는 현실의 무게와 충격을 홀로 견뎌야만 한다. 편하게 요리를 하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도 주어지지 않는 곳. 2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는 지저분하고 어두운 주방. 도심의 만만치 않은 생활 물가. 당연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삶의 일부(어떤 면에서는 전체라고 볼 수 있는)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한 사람의 삶은 더욱 작고 초라해진다.


삶을 지탱해 주는 디딤돌을 갖추기 못한 타의적 미니멀 리스트들의 명절 저녁. 텅 빈 주방에서 끓여낸 김치찌개를 손에 들고 나는 허둥지둥 방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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