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꿈에 바람이 스치는 곳

by RNJ
청춘의 꿈에 바람이 스치는 곳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과거는 아주 자연스럽게, 무의식 속에서 좋은 기억으로 애써 포장되곤 했다. 그러나 고시원에서의 기억은(좋은 기억과 슬픈 기억을 막론하고) 여전히 선명하게 날이 선 채로 남아 있음을 은연중에 느낀다. 고시원을 떠난 지 벌써 여러 해가 흘렀다. 마음을 조금씩 침잠시키는 과거를 풀어낼 방법을 찾기 위해 당시에 남겼던 기록을 다시 읽으며 기억의 포장지를 뜯고 다시 조용히 덮으려고 한다.


고시원에 살 땐 자주 우울했고, 때론 분노를 느꼈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언제나 시간을 두고 나에게 곧장 돌아왔고, 고시원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불을 끄고 며칠을 말없이 보내는 일은 어쩌다 보니 하나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소음이 넘쳐나는 불협화음의 공간 속에서, 귀를 틀어막은 채 나만의 화음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성장하기에는 이곳의 지반이 너무나 불안정했고, 마음껏 흔들리기에는 혼자 몸을 떨 공간조차 부족했다.


깊이가 보이지 않는 우울감 속에 빠져들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바닥까지 추락할 수 있었다. 아니, 지금 나의 처지를, 나를 보호함과 동시에 가둬버리는 이 공간을 바닥이라 정의하기로 했다. 더 이상 밀려나지 말아야겠다! 모든 ‘실패’를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내고 땜질을 했다. 무작정 글을 썼고 그림을 그렸다. 한없이 이어지는 우울과 무기력의 고리를 풀어내고자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골방 속에 담긴 나의 현주소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고시원에서 남긴 기록을 다시 읽으며 무기력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보다 온정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무너져야 할 이유가 있었고 이와 동시에 다시 일어나야 할 이유도 있었다.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모든 시행착오, 결핍과 불편함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새로운 방향에서 흔들었고 나의 기반이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제대로 깨닫게 해 주는 소중한 기회가 되어주었다.


고시원 생활을 정리하고 어떠한 계획도 없이 제주도로 떠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금 더 넓고 크게 숨을 들이쉴 수 있는 원룸(수도권 고시원보다 월세가 저렴한)에서 마음껏 흔들리며 살았고 지금은 아이와 함께 투룸으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일에 도전했고 보람을 느끼며, 마음껏 여행을 다녔고 소중한 사람을 만났으며,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면적 또한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시원 3평-> 원룸 7평 -> 분리형 원룸 11평 -> 투룸 18평). 지금은 '브라보!'한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아직 잘 모르겠다. 독립의 시작점이자 방황의 종착지였던 고시원 골방을 생각하면 어두운 창고에 남겨진 먼지 끼고 녹이 슨 캐비닛이 떠오른다. 나는 고시원에 무언갈 놓고 온 걸까, 아니면 버리고 온 걸까?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켜켜이 쌓인 공무원 수험서와 깨진 소주병, 부러진 기타와 지저분한 오선지. 바쁜 걸음으로 오가는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찬 생기 없는 눈빛들. 피곤한 우리 시대 청춘과 중년의 자화상. 모든 것이 부족한 결핍의 장소에서 열정과 희망을 발견하는, 그러나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는 이야기. 제목과는 달리 전혀 ‘브라보!’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 브런치북 1층에는 개인적인 이야기, 2층에는 개인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살고 있다. 순서대로 구경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똑같은 방이 이어지는 고시원처럼 이야기도 조금씩 비슷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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