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石川)을 걸으며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어느 날 문득, 조용한 사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저는 침묵과 정적이 너무나 필요했거든요. 지도에 검색해 저에게서 가장 가까운, 그리고 산에 위치한 사찰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린 후, 저는 한라산 아래에 위치한 관음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더군요! 주말을 맞아 절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절 마당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앰프와 전자악기들이 세팅되고 있더군요. 살면서 제 발로 절을 찾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는데... 웃음밖에 안 나왔습니다. 절 마당에서 울리는 대중가요, 힘 있고 매력 있는 목소리를 마음껏 뽐내는 성악가. 아, 왜 하필 오늘일까!
낙심하여 발걸음을 돌리려던 차, 절 옆으로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는 안내판을 발견했습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등산로는 삼의악 오름까지 이어지더군요. 제법 괜찮은 산행이 될 것 같아 즉흥적으로 등산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절밥 체험장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등산을 시작하려는 찰나, 코로나로 절에서 식당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가방에는 수첩과 볼펜, 스테인리스 컵이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음식이나 물을 구입할 곳이 주변에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등산로가 5km 정도니... 그다지 힘이 들지 않겠지? 물이야 계곡물을 마시면 될 테고'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판단 착오였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대부분의 계곡은 '건천(乾川)'입니다. 비가 내릴 때는 물이 흐르다 비가 그치면 물이 흐르지 않는. 한라산에서는 종종 하룻밤 사이 1000ml에 가까운 비가 쏟아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건천은 제주의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바다로, 땅 밑으로 실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자연 배수로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이런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외지인인 저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 등산로이니 만큼, 물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라는 헛된, 그리고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었던 거죠.
물이 없는 계곡 등산로에서 마주한 계곡입니다(아니, 물은 어디 갔어?). 물은 단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었고, 바위가 그득히 들어차 있었고 바위 사이사이에 고인 조그마한 돌가루들이 마른 먼지를 풀풀 피워내고 있더군요. 스테인리스 컵을 들고 멀뚱멀뚱 계곡을 쳐다보았습니다. 뭐여, 계곡에 흐르는 것이 돌 뿐이네? 혹시 비가 내리지 않을까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오늘따라 하늘이 청명하다 못해 새파랗게 푸르더군요. 그렇게 단수(斷水) 등산이 시작되었습니다. 걸음이 저절로 빨라지더군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고여있는 물
한두 시간쯤 걸었을까요? 계곡 아래로 물이 보였습니다! '아, 드디어 내 갈증을 달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계곡 아래로 후다닥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흐르지 않는 고인물이더군요. 언제 여기에 도착했는지 알 수 없는, 제조 기한이 붙어 있지 않은 자연 삼다수. 원효대사처럼 눈을 딱 감고 마셨으면, 감칠맛 넘치는 생명수가 되어주었을까요?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하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거친 숨결이 목구멍을 따라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예고 없는 강행군에 정신을 못 차리는 저의 허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저는 나무 둔치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들숨과 날숨.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이야기. 그제야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이끼가 무성히 덮인 나무뿌리에서 솟아난 조그마한 버섯. 바위 위에서 입에 무언가를 열심히 밀어 넣던 다람쥐. 속도를 늦추니 자연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갈증을 잊고 천천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산속에서 발견한 침묵과 정적으로 저는 몸과 마음의 갈증을 함께 달랠 수 있었습니다. 하나도 제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던 오늘의 계획들이, 저를 자연 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무음(無音)의 세상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계획 없이, 발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상자를 이곳저곳에 숨겨 놓고 기다리곤 합니다. 이날 제가 발견한 선물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텅 빈 가방 하나를 들고 시작한 등산. 제가 절에서 찾고자 했던 침묵의 자유는 절이 아닌 바로 산속에 있었습니다. 기대 없이 마주한 모든 풍광은 이보다 더 아름답고, 더 고요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저는 이곳에 올 운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