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떠나는 사람들

겨울의 한라산

by RNJ
눈이 내리면 떠나는 사람들

잎이 떨어진 겨울나무는 빈 가지에 푸른 하늘을 품습니다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어...'


눈이 내린다는 뉴스를 듣고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한라산 겨울 산행을 위한 등산 가방. 한라산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퍼져나가면, 한라산의 겨울 설경을 감상하기 위해 전국의 등산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눈이 쌓인 등산길은 미끄럽고 축축하며 진창길이기 일쑤이며, 나무가 적은 정상부는 칼바람으로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산을 오르는 데는 이런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는 무언가가 산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백록담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판악, 관음사 코스부터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라산을 만날 수 있는 영실, 어리목, 돈내코 코스, 한라산 둘레를 따라 조성된 한라산 둘레길 등 다양한 산행로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눈이 내린 한라산 풍광을 가장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성판악 코스, 그리고 영실-어리목 코스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한라산 등반 5개 코스


백록담으로
성판악 코스


이른 새벽부터 제설작업이 시작되는 겨울의 도심과는 달리, 산에 소복이 쌓인 눈을 치우는 존재는 바람과 햇빛, 등산객들의 발자국과 그들이 내뿜는 거친 숨결 정도입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산은 그야말로 순수(純粹)의 세상입니다. 제 색과 멋을 뽐내던 나무와 바위를 덮은 새하얀 눈. 냉기를 머금은 눈보라가 불어닥치면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땅인지 구별할 수 없는 순백의 세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 아래 드러나는 설경. 자연스레 감탄이 터져 나옵니다.


겨울 산행이 비교적 힘들지 않았던 이유는 눈을 즐겁게 하는 이런 풍광 덕분이었습니다. 눈이 즐거우니 마음이 즐거워지고, 마음이 즐거워지니 걸음이 가벼워지더군요. 모퉁이를 돌고, 숲을 만나고, 숲을 벗어나면 만나는 모든 세상이 아름다웠습니다. 파란 하늘과 하얀 숲,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도시, 그 경계 너머로 펼쳐진 푸른 바다, 산을 스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깊은 산, 숲길에서 발걸음을 멈추면 고요한 침묵의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거친 숨소리가 천천히 잦아들면 내가 오기 전까지 이곳이 얼마나 고요한 공간이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나무 사이로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바람결에 서로를 간지럽히는 조릿대 소리.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고요한 숲에서 만난 청명한 하늘. 쉼 없이 흘러가는 그 어느 장면도 쉬이 놓아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순 없다
영실, 어리목, 돈내코 코스

한라산과 눈


한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꼽자면 바로 영실코스에서 보이는 한라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실 코스는 등산로 입구부터 웅장하고 멋들어진 기암괴석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등산로 중간에 제법 가파른 구간이 있지만 풍광이 몹시 좋아 등산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영실코스는 왕복 4-5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일정이 바쁜 여행객들이 한라산을 즐기기에 가장 적합한 코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파른 계단 코스를 주파하고 나면 평평한 고원이 펼쳐집니다. 탁 트인 고원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한라산. 눈 덮인 한라산 정상부는 겨울 제주도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입니다. 계단 중간중간에서 파김치(?)가 되었던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아름다운 풍경과 평평한 등산로를 만나 "와! 올라오길 정말 잘했다"라고 외치곤 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이 격언을 가장 손쉽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영실 코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눈이 소복이 깔린 등산로는 비단결같이 부드러웠습니다.



윗세오름에서 어리목 코스로 하산하면 하얀 눈으로 덮인 습지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햇빛에 녹은 눈과 얼음 사이로 맑은 물들이 고여 푸른 하늘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눈이 내리면 산으로 떠나는지, 공감이 되시나요?

겨울산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을 위한 팁

아이젠과 스틱, 식수와 간식
내 간식을 훔쳐(?) 먹은 까마귀

가방에 물 한병 들고 떠나도 그다지 무리가 없는 여름 산행과는 달리, 겨울 산행은 꽤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여벌의 외투, 목폴라, 장갑과 모자를 착용하여 체온을 잃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발이 젖지 않기 위해서 방수가 되는 등산화(=고어텍스 등산화)를 준비하는 편이 좋습니다. 또한 등산 스틱을 활용하여 무게 중심을 나누고 눈길에서의 미끄럼을 방지하는 것을 권합니다.


성판악, 관음사 코스는 등산 난이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9시간가량이 소요되는 장거리 코스이기 때문에 체력을 보충할 음식과 식수를 넉넉히 챙기는 편이 좋습니다. 겨울은 다른 계절에 비해 해가 짧기에 늦지 않게 산행을 시작하는 것을 권장하며(만약 심혈관계 질환이 있다면 겨울 산행은 자제하는 편이 좋습니다), 동절기 입산 통제시간과 진달래 대피소 마지막 입장 시간을 염두에 두시고 넉넉하게 일정을 짜야합니다. 그리고 한라산에는 등산객들의 간식을 노리는 영리한(?) 까마귀가 많습니다. 정말이냐고요? 제가 당했거든요. 하하하...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1950m). 꼼꼼한 준비가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을 꼭 유념하시고, 즐거운 겨울 산행을 계획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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