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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들거나, 빠져나오거나

템플스테이, 극에서 극으로

by RNJ
빠져들거나, 빠져나오거나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옅은 빗줄기. 숲을 헤치며 간간히 퍼져 나오는 햇빛 아래 타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산중의 밤은 언제나 빨리 찾아온다지만, 길게 늘어지는 초여름 해는 열기를 쉽게 거둘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타종 횟수를 세며, 고요한 절간 사이사이를 천천히 걷습니다.


무신론자인 저에게 종교 시설은 신비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일상적 사고의 정지를 유발하는 공간입니다. 등산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절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잠시 쉬어가고 목을 축이기에는 이만한 장소가 없더군요. 오고 가는 길 위에서 몇 차례 눈길이 머물던 한 절에서 템플 스테이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비교적 한가한 날에 하룻밤 일정을 예약했습니다. 오늘 하루는 조금 더 오래 쉬어볼 생각이었습니다.


템플 스테이는 재미가 없습니다


침실 벽 한쪽에 붙어있던 안내문에 이런 글이 적혀있더군요.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당연하지! 템플 스테이에 재미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겠어? 고요한 산중에서 휴식을 하려고 온 거지!' 이 다짐이 무색하게... 밤에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재미없네?' 적막한 절간, 간간이 들려오는 목탁 소리. 입도 없는 바람이 가장 소란스러운 공간.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고 생각한 고대 철학자들의 생각을 잠시 빌려, '21세기 인류는 재미와 소리의 진공을 싫어한다'는 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놓기 어렵고, 랩탑과 뉴스에서 떨어지기 힘든 세상입니다. 끝없이 팽창하는 온라인 공간의 최종 목적지가 오프라인 세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흘러넘치는 형체 없는 정보, 소리, 재미에 잠식되어 살아갑니다.


절의 입구이자 출구


부재와 비교를 통해 정의되는 세상에서 극과 극의 체험을 제공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채소만으로 이루어진 절밥, 자판기 하나 없이 약수만 흘러넘치는 곳. 인사와 수다는 합장이 대신하고 느린 산행이 조깅을 대체하는 공간. 단 하루의 경험이었지만, 일상과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시류에 편승하는 삶, 그리고 시류에서 멀어지는 삶. 그리고 이 중간 어딘가에서 쉼 없이 이루어지는 진자운동. 삶의 균형은 정적이고 고착화된 방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 극단을 오고 가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서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내면으로 빠져들고, 속세로 빠져나오는. 기묘한 힘이 느껴지는 돌길을 뒤로하고 다시 속세의 품을 파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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