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묻는다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흥준 교수님처럼 '영실'이라 답할 겁니다. 제주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묻는다면... 저는 송악산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제주의 가장 남쪽, 섬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송악산에 오르면 남한 최고봉 한라산(1950m)과 최남단 마라도를 함께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산방산, 가파도, 사계해변... 이 근방은 볼거리도 참 많고, 운이 좋다면 돌고래와 파도가 만드는 하얀 군무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남쪽에 있는, 오래된, 유명 연예인이 다녀간 등등. 야심으로 가득 찬 제주도의 관광지는 이런 수식어를 참 사랑합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도시 뒷골목에 자리 잡은 노포 골목의 소란스러움이 떠오릅니다. 모든 이모님들이 자기 가게가 "찐" 70년 원조라고 주장하지만, 중고차도 아닌 한 끼 식사에 연식을 따지는 사람은 잘 없죠. 사람들은 맛깔나고 양이 푸짐한 가게에 몰리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수식어가 길게 늘어지는 관광지일수록 알맹이의 맛을 느끼기 힘든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송악산은 등산로 입구에서 간판 없이 장사하는 숨겨진 로컬 맛집 같은 장소입니다.
"송악산은 제가 강력하게 추천해서 코스에 넣었어요."
학생들에게 제주의 지질과 지형을 열심히 설명하던 과학 선생님 한분이 떠오릅니다. "저번에 송악산에 왔을 때... 너무 아름다웠어서..." 송악산에서 느꼈던 감정의 기억, 과거를 거슬러 올라 만난 원류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우리 반 아이들이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애들이 우리보단 경치에 무심하니..." 여행 내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아이들에게도 심미안은 있습니다. 다만 평가-판단 시간이 어른보다 조금 많이 빠를 뿐이죠. 송악산 입구는 여느 오름, 해안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학생들은 잠시 후 펼쳐질 유일무이한 절경을 앞에 두고, 제주 스타벅스나 관람하자는 대안 아닌 대안을 내놓습니다(과학 선생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흐릅니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 아이들. 지도사는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집니다. 첫 입부터 달콤함이 기득 느껴지는 맛도 좋지만, 내가 무언가에 허기졌음을 알게 해주는 맛이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깐요. 수다를 떨며 걷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제주의 끝자락에 도달했습니다. 저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가 보입니다. '6시 내 고향'이나 '무한도전'에서 봤던, 짜장면으로 유명한 국토 최남단. "정말이에요? 저기가 진짜 마라도예요? 엄청 가깝네!" 북쪽 하늘에는 힘이 넘치는 백록담 남벽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제주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송악산은 우리가 여행할 수 없는 철조망 너머의 세상으로 남을 뻔한 장소입니다. 알뜨르 비행장과 송악산 일대에 군사기지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던 안덕면, 대정읍 주민들과 제주 시민들의 반대가 이어졌고, 개발은 전면 백지화되었죠. 탑-다운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국토개발에 시민들이 반발하였고 국회가 응답했습니다. 일본군이 송악산 아래에 파놓은 동굴진지와 알뜨르 비행장,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대체지 후보, 몽골인을 위한 말 목장. 힘이 교차하는 완충지이자 전초기지. 제주도를 바라보는 외부자들의 시선 속에는 시대를 막론한 강한 일관성과 확신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제주도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내재가치를 조금씩, 쉼 없이 주입받은 섬입니다. 곳곳에 솟아있는 기생화산의 분화구가 침략받은 크레이터처럼 느껴집니다.
영국은 1700년대부터 본토에서 약 1700km 떨어진 이베리아 반도의 끝자락 땅, 지브롤터를 속령으로 삼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브롤터는 지중해를 대서양과 연결 짓는 고리이자, 해양 패권 유지에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죠. 이 작은 도시는 벙커링, 금융업, 관광업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인당 GDP는 영국 본토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부자도시 싱가포르보다 높죠. 높은 물가와 물류비용, 저임금과 노동력 부족, 전국에서 GDP가 가장 낮은 전략적 요충지 제주도는 최근 몇 년 동안 외국 자본 이슈로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송악산도 이런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이에 시민들과 의류 브랜드 파타고니아가 개발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하였죠. 제주시 연동의 바오젠 거리는 사드 배치와 코로나를 기점으로 누웨마루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들던 길목은 이제 술집, 음식점, 노래방으로 가득 찼습니다.
옛 서귀포사람들은 뱀을 박멸하기 위해 절울이 오름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불길이 사그라진 잿더미 위에 새로운 주인인 소나무가 쑥쑥 자라납니다. 이곳은 이제 '송악(松岳)산'이라 불리고 있죠. 기후가 변하고, 산성비가 내리고. 재선충으로 고사한 소나무가 곳곳에 보입니다. 수많은 나무와 뱀이 이곳에서 죽었고, 이젠 소나무가 제 빛깔을 잃어갑니다. 이곳이 관광지로 개발되었다면 '송악랜드', 군사 공항이 들어왔다면 '대정민군복합공항'같은 이름이 붙었겠죠. 마라도를 보기 위해 입장료를 내야 하거나,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을 겁니다. 불타는 검을 든 인간이 에덴을 불태웁니다. 화전(火田)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