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재와 포구, 바다의 밀도

by RNJ
협재해변과 비양도

많은 이들이 부산하면 해운대나 광안리를 떠올릴 겁니다. 파라솔로 가득한 해수욕장, 제트스키와 서핑을 즐기는 여유 넘치는 관광객과 소란스러운 카페. 부산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저는 부산을 조금 다른 색깔로 기억합니다. 부산의 남서부지역의 바다는 말 그대로 정말 바다다웠습니다. 물은 어둡고 탁했으며 도시 어디서든 습습한 해풍이 느껴졌죠. 자갈치를 감싸 안은 어선은 검은 연기를 쉼 없이 뿜었고 그 사이로 거무죽죽한 갈매기떼가 힘차게 날아다녔습니다.


집에서 가장 가까웠던 다대포 해수욕장에는 수영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부둣가에는 컨테이너를 가득 싫은 화물차가 쉼 없이 이어졌죠. 제가 기억하는 고향의 바다, 부산의 바다에서는 땀, 그리고 달달한 숨 내음이 느껴졌습니다. 자갈치 아지매들은 좌판 생선 위로 얼음물을 끼얹었고, 하얀 냉기를 내뿜는 화물을 하역하던 아저씨들은 고함을 지르고. 해운대와 광안리는 타 지역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진 파라다이스였죠. 평생 바다를 바라보고 맡으며 살았지만, 바다에서 온전한 자유와 시간을 누린 것은 제주도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학여행 첫날은 보통 제주시 관광지 한두 곳을 둘러보고 서귀포에 있는 호텔로 곧장 넘어갑니다. 비행기 연착이 밥먹듯이 반복되는 제주공항에선 1~2시간이 '아차!' 하면 사라지기 일쑤였죠. 이런 이유로 사전에 예약과 조율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바다부터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학생, 선생님, 지도사 할 것 없이 모두가 신이 납니다. 넓은 해변을 따라 흩어지는 아이들을 관찰하기도 좋고, 구름과자 타임을 가지려는 아이들이 숨을 장소도 없습니다. 바다와 사전에 조율해야 하는 것은 날씨 밖에 없습니다. 물론 바다가 우리의 말을 듣어주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제주공항에서 차로 10~15분만 이동해도 맑고 푸른 바다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고 학생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봅니다 "이게 제주지!" "여행 온 것 같네!" 버스 유리창에 렌즈를 바짝 붙인 다음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제주의 거센 바람이 느껴집니다. 기념품 가게에서 산 당근모자가 저 멀리 날아가고, 파도는 공백의 경계선을 거칠게 밀어붙입니다. 학생들은 협재 해안에서 비양도를 풍경으로 사진을 남깁니다. 지도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어줍니다. 점점 구도와 인물 배치의 달인이 되어갑니다.


이름난 해변과는 달리 여행객들이 잘 찾지 않는 바다는 색과 냄새의 밀도가 아주 높습니다. 홋줄이 오래된 전봇대의 전깃줄처럼 이리저리 얽히고, 거대한 부두에 조밀하게 들어찬 하역장, 경매장, 어판장... 많은 이들의 생계가 달린 바다는 어둡고 탁했습니다. 드럼톰에 피운 불과 얼음으로 가득 찬 수레. 생선 비늘을 뒤집어쓴 선원과 아지매. 상대적으로 한적하고 고요한 제주 바다는 처음 보았을 때 트루먼쇼의 바다 세트장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변에 있는 모두가 웃고, 떠들고, 즐거워 보입니다. 밤에는 폭죽이 터지고, 삼삼오오 모여 산책을 하고, 캠핑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저 멀리 수평선, 어부들의 별빛이 어둠의 장막 아래에서 빛을 발합니다. 빛이 사라진 까만 원해 위에서 떠도는 배를 볼 때마다 부산의 바다가 떠오릅니다.


학생들이 수평선에 떠오른 어선의 불빛, 따듯한 입김과 비린내가 섞인 어판장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화려한 모습 뒤편에 어떤 열기가 숨어있는지, 포구와 해안의 색깔이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리얼리티 콘텐츠가 곽광을 받는 세상입니다. 무대와 영상은 감상을 분절하고, 의미 그대로의 리얼리티는 시공간이 함께 흐르죠. 테마파크와 박물관만 왕복하던 아이들은 이곳을 잘 만들어진 섬으로 기억하고 떠날 겁니다. 가끔은 수학여행이 수학도, 여행도 아닌 하나의 산업으로 느껴집니다. 단체 관광객은 제주에서 관광객과 상인과 무대만을 만납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플래카드를 빳빳하게 펼치고, 단체사진을 찍자마자 버스에 탑승해야 할 때. 설명 없는 지시를 내리며 무감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빽빽한 일정표와 쉼 없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쑤셔 놓고 학생들과 바다를 걷습니다. 학생들은 큰 비용을 치르고 멀리, 제주까지 왔습니다.


학생들이 찾아오지 않는 주말. 버스를 타고 작은 어촌을 찾아갔습니다. 고무슈트를 입은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갑니다. 해산물로 가득한 망태기를 짊어진 채. 바닷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햇빛을 머금은 아스팔트 위에서 바닷물은 곧장 말라버립니다. *불턱은 사시사철 비어있고 해녀들은 대문이 없는 집에서 노고를 스스로 달랩니다. 포구를 바라보는 해장국집에서 아저씨들이 소주 한잔에 조업 이야기를 나눕니다. 골목은 대체로 텅 비어있습니다. 탑동 산책로 끝에서 제주항을 바라봅니다. 섬의 가장 거대한 문턱조차 쓸쓸해 보이는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바다를 관찰하고 즐길 수 있는 시대입니다. 감사함과 미안함을 함께 느낍니다.


*불턱 : 해녀들이 휴식하는 장소. 돌담을 쌓고 불을 피워 바다의 추위와 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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