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는 아주 오래된 관광지입니다. 이곳에서 찍었던 인기 드라마는 '올인'은 10대 학생들에겐 고전 시가와 다름이 없고, 30-40대 선생님들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해풍에 깎여 헐벗은 오래된 건물과 이름만 바뀐 코지 하우스, 등대 아래로 이어지는 녹슨 철 계단과 어지럽게 피고 지는 억새와 들꽃. 저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입니다. 우후죽순 올라간 낮은 건물들 사이로.
"재사(才士)가 많이 나오던 곶 지형인데..." 종종 버스 기사님이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에게 다음 여행지를 소개할 때가 있습니다(하루종일 학생들을 상대하느라 목이 쉬어버린 지도사로서는 황송할 따름입니다). 몹시 수다스러운, 여행 베테랑 40대 중년 기사님도 설명을 멈칫하게 만드는 여행지. 드라마 올인은 20년 전에 촬영했고, 이제 누가 주연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재사의 이름 또한 알 길이 없습니다. 섭지코지에 미술관을 설계한 안도 다다오만이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내비칩니다. 한 해에만 200만 명이 찾아오던 열기의 땅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완전히 식어버린 흔하디 흔한 화산지형이 되었습니다.
거센 바람과 파도 소리. 이곳은 무엇하나 자신감 있게 솟아있지 못한 장소입니다. 매끈하게 뻗어있는 섭지해안과 광치기 해안, 해안선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성산일출봉이 섭지코지를 내려다봅니다. 거대한 산성 앞에서 인간의 건축물은 힘없이 흔들립니다. 해안사구와 붉은오름은 침식과 개발로 조금씩 뭉툭해집니다. 인간과 파도의 협치가 유려한 제주의 반도를 피골이 상접한 땅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작년에 개최된 '세계유산축전'은 거문오름, 만장굴, 김녕굴 같은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유산의 가치를 알림과 동시에, 위대한 유산을 배경으로 다양한 예술 전시와 공연을 선보였던 아름다운 축제였습니다. 형형색색의 조명과 함께 빛나는 국악기의 선율, 비보이와 무용수가 만나 어우러지는 신비로운 현대 제천행사. 끓어 넘치던 대지가 흘린 자연의 걸작을 뒤로한 채, 땀과 숨결이 한 곳에 응축된 인간의 예술이 일출봉 광장을 환희의 현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시민들은 잔디밭에 자유롭게 흩어져 앉아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들의 어깨를 빌려주고 있었습니다.
섭지코지는 엄청난 자본과 전국구 배우가 투입된 넷플릭스 드라마를 촬영하거나, 갑자기 석유라도 뿜어져 나오지 않는 이상 발길을 끌어당기기 어려운 개성 없는 휴게소가 되었습니다. 어딘가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관광지. 섭지코지를 보며 무책임보다 무서운 것은 무감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전 지도사는 학생들에게 이곳을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바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불신과 갈등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땅은 마치 귀가 있는 듯이 반응합니다. 개발이 멈추고 자본이 잠식된 해변과 중산간 지역에는 빨간 락카로 덧칠된 출입금지 표지판이 곳곳에 박혀있습니다. 중장비가 잠에 빠져들고, 흙먼지만 날리는 갈라진 땅에서 잡초만이 분주하게 자랍니다.
일본과 대만, 다시 동남아로 떠나는 관광객. 필수재가 아닌 대체제로, 목적지가 아닌 휴게소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제주도가 '이보다 더 못하지 않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빗물에 젓은 나이테가 아닌, 살아있는 이파리를 보며 환경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제주도를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