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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거나 쉬거나 멈추거나, 모두거나

한라산(2023)

by RNJ
한라산(2023)


신만이 완벽할 뿐이다.
인간은 완벽을 소망할 뿐이다.
괴테


틴트를 든 오른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림도 숨을 죽이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호자용 침대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다 보면 병원도 집처럼 느껴진다. 환자처럼 병실에서 먹고 자고 싸고 씻고. 돈을 잃지 않기 위해 간병인을 자처해야 했던 시기에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통잠을 잘 수 없는 길고 외로웠던 밤이었다. 가래 끓는 소리가 들리면 석션을 하며 가래를 뽑아야 했고, 맥박이 갑자기 요동치며 환자 모니터가 정신없이 울릴 때는 여지없이 시트로 대변이 흘러나왔다. 밤에는 근무하는 간호사가 적다 보니 혼자서 무엇이든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가끔은 뮤트 버튼을 누르고 *EKG 모니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심장의 활력을 전달하는 초록색 선을 바라보며 우려와 안도감을 함께 느꼈다.


*EKG 모니터 : 심장의 전기적 활동을 분석하여 파장 형태로 기록한 것을 출력하는 장치.


가끔은 응급실로 뛰어가야 했다. 한 번은 택시 기사님이 00 대학병원이 아닌 00 대학교로 냅다 달린 적도 있었다. 택시 기사님은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고 나는 돈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병원 입구로 달려갔다. 울음이 멈출 때까지 담배꽁초로 엉망이 된 장례식장 뒷골목을 서성였다.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언제나 늦지 않게 도착했지만 정작 임종은 지켜보지 못했다. 생체신호를 알려주는 모니터는 모두 치워져 있었고 언제나 불안하게 떨리던 눈빛은 완벽하게 고정된 채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명과 보호자 생활을 그렇게 끝이 났다.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때 매주 한라산을 올랐다. 몇 달 뒤에는 쉬는 시간도 없이 등산과 하산을 마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랐고 평지를 걸을 땐 초콜릿 바를 씹었다. 버스 첫차로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점심 즈음에 끝이 났고, 동네 백반집에서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10년에 가까웠던 시간, 심장소리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왜 미친 듯이 산을 올랐을까? 내 몸뚱이 안에도 하나의 심장이 있다는 사실을 등산을 통해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심장이 힘차게 뛴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아니, 언제부터 몰랐을까?


차갑게 식어버린 한라산을 보며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1,000년 전 마지막 박동을 끝으로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는 한라산. 땅의 수축과 이완은 인간의 기준에선 무한한 침묵과 다를 바가 없다. 언젠가 동굴에 새로운 피가 가득 들어차면 산의 심장도 펌프질을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땅이 태어나고 과거의 일부는 죽을 것이다. 휴화산이 다시 활화산이 되듯이 인간의 심장도 정지와 박동을 반복한다. 1초 동안 한 번을 뛸까 말까 한 심장은 1분 동안 평균적으로 60회 이상을 뛴다. 10년의 시간이 어쩌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긴 휴지기였을지도 모르겠다.


한라산의 박동을 그려보고 싶었다. 출력되지 않는 자연의 얕은 맥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재료로 붉은색 틴트를 선택했다.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의 맥박을 환자 모니터에서 초록색으로 표현하니, 녹음으로 가득한 자연의 생명선은 빨간색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틴트가 이루는 선의 작은 굴곡은 빈맥(1분에 100회 이상의 맥이 뛰는 현상) 일 수 있지만 심장 박동 사이클 사이에 숨어서 관찰되지 않는 미묘한 떨림일 수도 있다. 인간의 손길을 거치며 한번 정제되어 태어나는 리듬은 기존의 리듬과 완전히 동일하진 않겠지만,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인간과 산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복귀하고 이탈하는 여정을 소멸할 때까지 반복할 것이다.


이 그림도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스케치 없이 완성했다. 산의 입술에 틴트를 바르고 검지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흩어놓았다. 손가락과 그림이 함께 지저분해졌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완성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결말 없이 시작한 소설이 스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했다.


우리는 심장의 박출과 이완이 만드는 곡률 위에서 매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루만진다. 심장은 고민 없이 뛰어나간다. 나는 그림 위에서 두려움과 용기를 모두 포착했다. "고개를 넘으면 더 높은 고개가 등장한다" 제주의 오래된 선율을 발견한 김영갑 선생님이 섬 위에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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