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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 이요."

by RNJ

돼지기름이 묻어 반들반들 빛이 나는 아이의 입술이 한시도 쉬지 않고 오물거린다. 아이는 인생 첫 삼겹살을 함께 그림을 걸었던 지인의 가게에서 맛보았는데, 어찌나 만족스러웠던지 기름 묻은 입술로 지인 내외의 볼에 뽀뽀 도장을 하나씩 찍어드렸다. 가게를 떠나기 전, 지인은 종이에 도어록 비밀번호를 써 나의 손에 쥐어주셨다. 온종일 욕조에서 인형을 빨았고 현관문 옆방에 잘 말려두었으니 가져가라고! 주인은 일을 하느라 아직 돌아오지 못한, 어두운 집에 슬그머니 들어가 보니 20개도 넘는 인형이 침대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요, 이요!"


나는 <곰돌이 푸우>를 즐겨보던 아이였지만 당나귀 '이요르'는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Born to Be Blue. 우울한 표정과 삶에 달관한 듯한 행동거지(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도 비슷한 성격의 당나귀 벤자민이 등장한다),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린 피부와 힘 없이 축 늘어진 귀. 이러한 점 때문에 어린이들이 쉽사리 좋아하기 힘든 캐릭터이긴 하다만 아이는 환히 웃고 있는 수많은 인형 중 '이요르'를 자신의 애착인형 2호로 선택했다.


카시트에 갇힌, 엄마와 아빠의 품이 그리운 아이는 잠시 의미 없는 저항을 해보지만 곧 소용없는 행동임을 깨닫고 부모의 대체제를 요구한다. "이요, 이요!". 아이는 흔들리는 차에서 이요르를 꼭 끌어안고 쫑알거리다 쿨쿨- 잠에 빠져든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뒷좌석 문을 열 때까지, 잠든 아이는 인형을 손에 놓지 않았고 이요르는 빤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인형에게서 안정감과 친밀감을 발견하고 부모 외의 타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연습을 시작한다.


"이요! 이요!" 빵집 트레이에 아이가 좋아하는 단팥빵과 고로케를 올렸는데 아이가 갑자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아이는 유리 진열장을 가리키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 속에는 미소를 지은 채 우리를 바라보는 이요르가 프린팅 된 우유팩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이거! 이거! 응! 이거!" 아이는 제 스스로 고른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요르의 형태와 표정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아이는 이제 유사점을 바탕으로 동일한 대상임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아이는 형태와 기능이 유사해 보이는 낯선 대상을 두고 익숙한 언어를 호출하기도 한다. 아이는 지금도 초승달만은 '바나나'라고, 유기농 주스팩에 그려진 농부와 그림책 속의 판다를 "아빠!"라고 부른다. 세상은 넓고 이름도 많다만 아이의 머릿속엔 아직 200개 남짓의 단어가 질서 없이 얽혀 있고 이는 보더콜리 성견과 비슷한 인지 수준이다. 육상에서의 신체능력은 아직 펭귄 수준을 못 넘어고 있지만!


부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골이 아픈 아이의 말을 '정정'해주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얼마 전엔 침대에서 인형과 뒹굴거리던 아이가 방문을 불쑥 열어젖힌 엄마를 향해 "가! 가!"라고 외치곤 다시 인형 사이를 띵굴띵굴 굴러다니는 게 아닌가! 우울증에 걸린 당나귀 인형을 어루만지며 행복을 느끼는 아이를 보며 우린 그저 복슬복슬한 촉감을 좋아하는, 수다스럽기 짝이 없어 불행할 수밖에 없는 포유류임을 깨달았다.


“Hugs were invented to let people know you love them without saying anything.” - Bil Keane


이요르와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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