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은 하나였다
두 번째 유산 후,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나의 세상은 달라졌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려 해도 힘이 나지 않고, 만사가 귀찮았다. 하루가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고, 사는 게 재미가 없고 무기력했다. 그때 알았다. '힘들다' 라고 말하거나 느낄수 있을때는 힘든게 아니라는 것을. 진짜 많이 힘들때는 그 감각도 없다는 것을.
난임의 고통은 누구에게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말해본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외롭다.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가 되레 상처만 두 배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픔 하나를 덜어내려다 상처 둘을 짊어지는 꼴이 된다. 그래서 난임 여성들은 입을 닫는다.
그나마 기댈 곳은 난임 카페나 단톡방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저마다 다른 상황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나보다 더 큰 상처를 가진 이들 앞에서 내 아픔을 드러내는 일은,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그곳은 축하와 위로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에서도 타인을 의식하게 되어 마음을 온전히 열기는 쉽지 않다.
그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도 상담이라는 걸 받아보면 어떨까?
지금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 희미한 가능성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상담 비용을 알아본 순간, 곧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난임 치료에 쏟아붓는 돈도 버거운데, 여기에 또 다른 지출을 더한다는 건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난임우울증상담센터’라는 곳을 알게 됐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라 비용 부담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냥 큰 기대하지 말고 뭐라도 한번 시도해보자.” 마지막 기대를 담아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마침 코로나 시기라 전화 상담이 가능했다.
서울·경기에 있어도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지친 내 마음을 조금 덜 무겁게 해줬다. 상담은 총 10회기, 매주 한 시간씩 진행됐다. 상담사는 내게 어떤 조언도 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질문을 던지고, 내가 한 말을 천천히 되짚어 줄 뿐이었다.
“그 날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병원에서 나오실 때,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질문하고 답하고 상담사가 정리해주고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을 조금씩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엉퀴어진 생각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느낌이었다.
매주 한시간 나는 상담사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난임 뿐 아니라 부부관계나 가족관계 내 삶의 전반적인 부분, 그리고 내 가치관에 관한 질문과 답도 오갔다.
"아기가 없어서 제일 힘든 부분은 무엇인가요?"
"물려줄 자식도 없는데 돈은 벌어서 뭐하나 싶어 직장스트레스도 견디기가 싫어요. 동기부여가 안된다고 할까? 버틸 이유를 잃은 느낌입니다. 삶이 생기가 없어요. 잔잔하고 평화롭지만 남편과 저 둘 다 나이가 들어가니 허전합니다."
이런 것을 비롯하여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서운했던 일, 지인으로부터 상처 받은 일 등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전화상이라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상담사는 나의 목소리 변화까지 짚어주었다.
“이 대답을 하실 때는 억양이 조금 올라가셨어요. 말이 빨라지셨고요.
목소리가 울먹이는 듯 멈추다가 다시 추스리고 대답을 하셨고요.”
전화 상담이었지만, 내 마음을 가까이에서 꺼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상담사는 작은 숙제를 내줬다. 그 날 먹은 3끼 식사를 기록하는 것, 운동시간, 그리고 수면 시간까지 기록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도움이 될까?’싶었다. 그러나 시키는대로 매일 하루하루를 기록했다. 밥을 안 먹거나 운동을 하지 않은 날도 기록을 위해서라도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3끼를 먹고 운동도 하고 잠도 충분히 자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 삶이 달라졌다. 결국 몸과 마음은 하나였다. 몸을 돌보는 일이 곧 마음을 돌보는 일이었다. 잠을 설친 날에는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졌고, 제때 먹지 않으면 우울감이 깊어졌다. 반대로 세 끼를 챙겨 먹고,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충분히 자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 단순한 진리가 내 마음을 서서히 회복시켰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순위를 매기는 숙제도 내어주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지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밖에 나가 햇볕을 보고 몸을 억지로라도 움직이고, 매일 아침 5분이라도 호흡을 지켜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실천하며 상담에 임했다.
10회기의 상담을 마치며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난임 치료를 몸의 문제로만 여겨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으로는 치료되지 않는다. 기존의 나는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있거나 힘들때 혼자서 삭히거나, 친구에게 털어놓거나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말할 때만 약간 시원할 뿐 그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제3자이다. 대화과정에서 어설프게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10회기의 상담이 끝나갈 무렵, 늘 듣고 되짚어만 주던 상담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찐스마일님은 다시 걸어가기 위해 이곳의 문을 열었어요. 그 용기 자체가 가장 큰 자산이에요.
인생에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정답이 없어요. 힘들면 포기도하고, 그러다 포기가 안되면 다시 도전하며 유연하게 살아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당신이 가진 당신안의 힘을 깨닫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우연히 경험한 난임우울증상담센터는 나에게 작은 힐링을 주었다. 그 후로 나는 마음이 아플 때 오히려 밥을 잘 챙겨먹고, 공원을 산책하고,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잠시 내려놓고 잠을 잔다. 나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남편도, 가족도 아닌 나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 난임은 몸의 병만이 아니다. 상처 난 마음을 보듬어 줄 때, 비로소 다시 걸어갈 힘이 생긴다. 당신의 마음도 치료받아야 할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