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을 함께 했던 우리, 난임동지
병원을 다니다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상황들을 이해받기 어렵다. 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이기에, 말 한마디가 의도치 않게 상처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난임 카페에는 주변인에게 털어놓지 못한 감정들이 쏟아지곤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인터넷의 불특정 다수 앞에 쏟아놓는 일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톡방을 만든다.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끼리,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오프라인 모임도 생긴다.
시험관 5차 이상, 40대만, 같은 지역 거주자 등 기준도 다양하다.
나 역시 처음엔 난임 카페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다 단톡방에 들어가게 됐다. 첫 방은 지역 모임이었다. 오프 모임도 참여했고, 서로 상황은 달라도 감정은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차수도 나이가 제일 많은 나는 실패가 반복되는데, 대부분 임신해 졸업해 나갔다.
새 멤버가 들어오면 난 늘 정보를 주기만 하고, 또 졸업하면 떠나보내는 일을 반복했다.
그때 깨달았다. 왜 ‘40대 방’, ‘9차 이상 방’처럼 비슷한 상황끼리 모이는지.
그 다음에는 정부지원이 끝난 사람들, 즉 9차 이상만 들어갈 수 있는 방에 들어갔다.
그곳은 대부분 서울·경기 거주자였고, 지방 사람은 나와 대구분 한 명뿐이었다. 그러다 난가연(난임가족연합회)이라는 단체에서 1회 시술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어 서울로 교육을 받으러 갔다. 그날, 그 방 사람들과 오프 모임을 가졌다.
그 방은 ‘과일가게’라는 닉네임 테마로 운영됐다.
나는 ‘감귤’이었고, 파인(애플), (블루)베리, 체리, 자두, 복슝(언니), 딸기 등 다양한 이들이 있었다.
나는 사주에 관심이 있어 독학으로 조금 공부했다.
그리고 그 날 분위기를 좋게하려고 사람들 사주풀이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상담사와 강사로 살아온 20년의 경험 덕인지,
나의 과도한 사투리 구사가 재미있었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인기 만점 사주풀이였다.
사주 풀이의 핵심은 단연 자식운.
신기하게도, 나를 포함하여 다들 물(水)이 부족하거나 넘쳐 균형이 깨져 있었고,
식상운(자식)도 약하거나 흐트러져 있었다.
그날의 모임은 낮부터 밤까지 웃음과 이야기로 가득했다. 기차역까지는 동갑 친구 파인이 태워줬고, 체리도 함께했다. 차 안에서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체리는 4살 연하의 남편과 10년째 사는데 여러문제들로 관계가 틀어졌고, 시댁의 출산 압박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파인이는 난자가 잘 나옴에도 질이 좋지 않아 이식조차 쉽지 않았다.
우리는 난자 공여의 합법화 문제, 결혼 제도, 삶의 허기짐 등 다양한 이야기로 마음을 나눴다.
그날 모임엔 요가복을 입고 배꼽이 보이게 등장한 요가강사 복슝언니도 있었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 잠시 참석을 했다. 40대 후반임에도 긍정적이고 건강해 보였다. 그녀는 42살에 결혼해 시험관을 하다 포기했지만, 최근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남편과 너무 행복하고, 닮은 아이가 생기면 더 좋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체리와 파인이는 복슝언니의 긍정에 감명을 받았다 했다.
자두와 베리는 나보다 5살 어리다.
자두는 약간4차원적인 엉뚱미를 풍기는데, 중기유산을 겪은 친구임에도 천성이 밝고 애교스럽다. 자두는 쌍둥이임신으로 제일 먼저 방을 떠났다.
베리는 나와 같은 시기 결혼임에도 차수가 15차수가 넘는 초스피드 진행의 추진력이 돋보인다. 이 친구 역시 말을 정말 맛깔나게 잘한다. 딸기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음에도 난저(난소기능저하)라 10년째 난임을 겪고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그렇게 기차는 부산역으로 향했고, 나는 생각했다. 시험관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도 대화할 수도 없었을 사람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남편이 마중 나왔고, 나는 활짝 웃으며 그날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그 방의 멤버들 중 대다수는 시험관을 포기하고 방을 나갔고, 몇몇은 임신으로 떠났다.
나도 결국은 시험관 포기 후 방을 나왔다.
그리고 체리는 남편과의 갈등 끝에 부산까지 날 찾아와 바다를 보며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요즘도 가끔 과일가게를 지나칠 때면 생각난다.
잘 살고 있니? 나 감귤이야.
그렇게 포기하고 방을 떠났던 내가
지금은 엄마가 되었어.
그 시절의 우리는 너무도 간절했지?
그 감정들을 공유하고 이해받을 수 있어서 든든했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너희들을 항상 응원해. 그 시절을 함께 해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