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46세 되던 해 2월, 한동안의 시술을 멈추었던 나는 다시 난임 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새 기분으로 시작하고 싶어 병원을 바꿨고, 의사 선생님도 새로 만났다. 교통이 편리해 오가기 좋았고, 대기 시간도 길지 않았다.
상담실에서 마주한 의사 선생님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폐경이 올 때까지 계속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담담한 말투. 나는 그 말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익숙한 시술이 반복되었고, 나는 묵묵히 병원 일정을 따라갔다. 한 달간 시술을 하다 잠깐 쉬는 시기에는 국비로 요리학원에 다니고, 요가 수업도 듣고, 가끔 문화센터 특강으로 내면을 다듬었다.
저녁이면 남편과 소소한 술 한잔,
주말엔 맛집과 뷰 좋은 카페, 때때로는 절에 가서 기도도 올렸다. 예전과 달리 삶은 전반적으로 평온했다.
시술 결과는 늘 같았다.
수치 0.
하지만 적어도 매달 난자가 하나라도 나와 이식을 시도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식 결과를 기다릴 때는 이제 임신 테스트기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가 돌아오면 조용히 회에 소주 한 잔, 그렇게 한 달 고생한 나와 남편을 위로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또 한 달 쉬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그해 12월, 우리는 시술을 접기로 합의했고
나는 새로운 길을 찾아 한 대학의 면접을 보러 갔다.
아쉬움은 없었다.
지금까지 시술에 쓴 비용도 상당했고,
이제 자비로 시도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이 정도면 정말 할 만큼 했다.”
미련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노력할 만큼 한 일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내 삶을 버티게 해주는 방식이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내 영역이었다면, 그 다음은 신의 영역이지.”
그런 마음으로 담담히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면접 본 대학에서 불합격 통보가 왔다.
조금 당황했지만 곧 받아들였다.
“몇 년 쉬었고, 나이도 들었으니 떨어질 수도 있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하루를 넘기려던 그때,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순간, 혹시 합격 번복?
황당한 상상을 하며 확인했지만
문자는 다니던 난임병원에서 온 것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올해 2월부터 국가지원 정책이 개편되어
지원횟수가 확대되었고
만 44세 연령제한도 폐지되었다는 것.
나는 그 문자를 보며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동안 자비로 시술을 받아온 내가 진작 듣고 싶었던 소식이었다. “하필 지금?”
마침 시술을 접기로 결심했는데...
마침 면접도 떨어졌는데...
그리고 마침 한 달은 시간이 텅 비어 있는데...
‘그냥 한 번 더 해볼까?’
그렇게 47세, 2월
나는 의도치 않게 12번째 이식을 받으러 병원으로 향했다. 그 시술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을 거라는 걸, 그때의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언제나 가장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