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한 번쯤은 일어나기 힘든 일이 내게도 일어나더라.
이식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고요한 나날을 보냈다.
이식 후면 늘 먹던 추어탕, 소고기, 포도즙, 아보카도, 두유 같은 것들은 이번에는 챙겨 먹지 않았다. 영양제도 전혀 먹지 않았다. 다만 매일 맞아야 하는 주사와 질정 그리고 약만은 잊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꼼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3일 배양한 배아는 이틀쯤 지나면 착상이 시도된다고 해서, 늘 그 즈음에는 시체처럼 3~4일을 누워 지내곤 했다. 격하게 움직이지 않고 조심히 걸으며, 스스로를 보호하듯 살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이식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 같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미용실에 가서 염색도 하고, 쇼핑도 하고, 오랜만에 통도사에도 들러 내 새 삶을 위한 기도도 드렸다. 그렇게 그냥 일상을 살았다. 아무런 증상도 없었다. 어쩌면 내가 못 느낀 걸 수도 있겠지만...
이전 두 번의 임신 때는 분명 증상이 있었다. 잠이 유독 많이 왔고, 아랫배가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몸을 예민하게 살피지도 않았고, 마음도 몸도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분홍색 돼지 한 마리가 우리 집 안방 창가에서 자고 있는 나를 네 발로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란 나는 산으로 도망쳤다. 한참을 뛰어가다가, '저 돼지가 우리 집에서 안 나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어 뒤를 돌아봤다.
그 돼지는 작은방으로 들어가더니 자리를 잡고 누워 잤다. 나는 옆사람에게 말했다.
“큰일 났어. 저 돼지가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웠어.
안 나가면 어떡하지?” 그랬더니 옆사람이 말했다.
“이 집이 지어지기 전에,
저 방이 저 새끼돼지가 살던 자리였대요.
동물도 자기가 살던 곳이 편한지 다시 와서 눕네요.”
그러다가 눈을 떴다.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돼지가 집안으로 들어온 꿈인데 당연히 복권사야지. 그 꿈 나한테 팔아.”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좋은 꿈 같아. 절대 안 팔아.”
뒤늦게 알았다.
분홍 돼지는 오래전부터 아들 태몽이었다.
그래도 시술을 했으니, 피검사는 한번쯤 해야 할 것 같아 집 근처 산부인과에 갔다.
5분이면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수치가 240이네요.”
“네...? 수치가 그렇게 높다고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보통 100 이상이면 임신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자궁외임신이나 비정상 임신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시험관 시술 받으셨다고 했죠?
수치는 딱 떨어지지 않아요.
시술 병원에 가셔서 자세한 상담을 받아보세요.
아직은 아기집을 보긴 이르고, 병원 지시에 따라 약 복용하시면서 기다리시는 게 좋겠네요.”
병원을 나오는 길,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어쩌면 그도 마지막 시술에 대한 희망을 어느 정도는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피검사 했어?”
“응.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수치 0이지?
마지막까지 고생했어.”
끊으려는 찰나, 나는 말했다.
“아니… 병원에서 수치가 240이래.”
“뭐? 그게 뭐야? 착상이 됐다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내일 대구에 가보려고.”
우리 둘 다 믿기지 않았다.
일주일 뒤, 수치는 2000.
초음파 화면 속에 작은 아기집이 보였다.
난황. 심장 소리.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그리고, 그토록 기다리던 한마디.
마지막 진료 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에게 감사카드와 쿠키를 선물했다.
그동안 친절히, 때론 묵묵히
힘든 환자인 저를 시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출산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할께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부산에서, 고령 임산부가.
나는 알고 있었다.
47세 여성이 무사히 출산할 확률은 얼마되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더는 기대도, 절망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오늘, 내 안에서 뛰고 있는 이 작은 심장 하나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47세의 어느 봄날,
나는 임신 9주 차 임산부가 되어,
마침내 난임병원을 졸업했다.
난임병원에 첫발을 디딘 후 5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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