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제는 나를 놓아주기로 했다

물방울 같은 배아와 함께한 나만의 졸업

by 찐스마일
나는 언제나 온갖 감정을 다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인생이 나를 찾아왔다. 어쩌면 ‘내려놓는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끝까지 버텨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조용한 마침표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난임병원은 대기실이 북적였다. 아마도 바뀐 난임 정책 때문이리라.


대기실 의자에는 나처럼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성들이 꽤 있었다. 연령 제한 폐지의 영향일까?

어쨌든 한때 고요했던 이곳이

오늘따라 왠지 활기차 보였다.


우울했던 기억들이 깃든 공간인데, 어쩐지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내 마음이 조금은 달라졌기 때문일지도. 의사 선생님은 여전히 친절하게, 내 상태를 꼼꼼히 설명해 주셨다. 마음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탓인지, 이달에도 난포가 안 보이면 계획대로 일을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설명에도 일희일비 없이 담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달은 무언가 다르다.
난포가 두 개나 보인단다.
늘 하나 겨우 보이더니, 왠일인지…


익숙한 시술 과정이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주사 하나를 놓으면서도 지난 5년의 기억이 슬라이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5년 전, 첫 자가주사를 놓을 때 내 배에 바늘을 찌르려니 어찌나 겁이 나던지... 그랬던 내가 이제는 간호사처럼 능숙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사를 놓는다. 스스로가 신기했다.


2주간의 자가 주사, 그리고 채취날.
시술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엔 늘 ‘득남불’ 벽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내 손을 그 벽화에 가져다 댔다.


1년 넘게 오르내리며 수없이 채취하고 이식했지만
그림이 뭔지, 글귀가 뭔지 인식하지도 못했었다.
늘 긴장된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채취 후, 진료실로 호출이 되었다.
보통 채취 후에는 주사실에 들렀다가 귀가하지만,
진료실 호출은 실패 위로일 때가 많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두 개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네 개가 있어 모두 채취했습니다."
미성숙 난자까지 포함해 모두 확보되었다는 말에
‘마지막 그림이 아름다워 다행이다’ 싶어 안도했다.


3일 뒤, 수정된 세 개를 이식하기로 했다.
새벽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몸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역 근처를 걷고,
병원 8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렸다.
너무 피곤했는지, 시술 직전 침대에 누운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찐스마일님~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간호사의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땐,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들 귀가하고, 마지막 남은 환자인 나만 남아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세 개의 배아 사진이 담긴 봉투와 병원에서 챙겨준 간식을 들고 역으로 향했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역 안 식당에서 익숙한 노래를 들으며 밥을 먹었다. 그때,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가벼웠다.


“너, 지난 5년 동안 참 고생했어.”
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날은 내 ‘난임병원 졸업식’이었다.


임신이라는 결말은 없었지만, 그 긴 여정을 버텨낸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기차 안에서 봉투 속 배아 사진을 꺼내 보았다.
세 개 중 하나가 유독 예뻤다.


물방울처럼 맑고, 꽃모양으로 균일한 크기의 그 아이. 아마 착상이 된다면, 저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상상을 하며 기차는 다시, 부산으로 달렸다.


47세 2월의 그날,

나는 5년간 다녔던 난임병원을 졸업했다.

초음파사진도 졸업축하카드도 아기용품선물도 없지만, 비록 나 혼자만의 졸업이지만,

스스로에게 축하를 보내며...




#난임정책 #47세출산 #배아이식 #신선이식 #동결이식 #pgs #40대후반시험관 #착상


keyword
이전 22화다시 시작되는 길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