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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작 Feb 20. 2022

ep35.   표현의 힘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개막되고 얼마 안돼서

중국의 쇼트트랙 경기 편파 판정 파문으로 한동안 나라가 들썩였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선, 우리나라가 제일 억울하긴 하지만,

세계 곳곳의 여러 나라들도 중국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표출된 시기를 경험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많은 외신들도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편을 들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디든 살짝 찌르기만 하면 터져 나오던 반중 감정이

어느새 대중화됐다는 체감도 느껴졌습니다. 그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요..

그래도 우리나라 선수들의 피땀 흘린 노고가 헛되지 않게

보여준 결과들이 있기에  국민으로서 또 스포츠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사뭇 저에게 다른 마음을 갖게 해 준 또 하나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미터 경기입니다.

라이브를 못 본 탓에 이상화 해설위원의 눈물 영상을 우연히 보다가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기사를 검색하다 한 칼럼에서 읽게 된 것인데,

지금의 우리의 감정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 계기가 된 것 같아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빙상여제에서 지금은 해설위원이 된 이상화 선수와

그녀의 절친이자 경쟁자였던 일본 고다이라 나오의 일화입니다.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을 줄 압니다.

일본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인 고다이라 나오는 이번 올림픽에도 출전을 했습니다.

은퇴한 이상화 선수와는 다르게 아직 현역인 선수입니다.

고다이라는 4년 전 평창 올림픽 때 이상화의 올림픽 3연패를 저지하며,

금메달을 따낸 이상화 선수의 라이벌입니다.

4년 전에도 1위와 2위였던 둘은 상대 선수의 경기를 배려하는

관중석을 향한 제스처와 서로를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찬사를 보낸 일화가 있습니다.


고다이라 오는 이번 올림픽에선 부진한 결과를 냈고,

이상화 선수는 해설을 하던 도중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펑펑 말이죠.

지금도 많은 영상들로 돌아다니고 있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이 느껴지는 눈물입니다.


이 한일 선수간의 눈물겨운 우정은 일본 언론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이 둘은 어떻게 친해졌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어

기사를 좀 찾아보다 한 칼럼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둘의 계기는 굉장히 평범했습니다.

오래전 선수 대기실에서 이상화가 친근하게 말을 건넨 것이

전부이자 계기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고다이라는 이상화를 롤모델로 훈련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릴 때부터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교육을 받아온 게 사실이고,

많은 역사적 상황들과 기록들이 우리를 그렇게 인식하게끔 만들어 준 것도

부인할 수 없다고 봅니다.

심층적으로 한일관계를 공부하는 교수나 학자들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수 있겠지만,

초, 중, 고를 겪은 우리나라 학생들의 대다수는 교과서에서 일본과 함께 배운 것이

일제 강점기, 마루타, 독립투사, 위안부, 독도 이런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인인 두 선수의 이야기는

어느 한쪽이 대인 배여 서가 아니라, 어렵다는 외교적 문제를 떠나

상호적으로 좋은 본보기인 것 같습니다.


만약, 이 두 선수가 대기실에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고,

적대적 감정만이 앞섰다면, 아마 이런 훈훈한 역사적 일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친근하게 진심으로 인사해준 말 한마디의 평범함은

비범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서로의 인정과 배려가 우정을 키워서,

서로의 나라에,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입니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저렇게 큰 긍정적 일화를 곳곳에서 만들고 있다면

아마 표현하기 힘들어진 사회에서

우리가 문제가 아니잖아, 사회가 문제야라고 탓만 하고 있진 않았겠죠?


저 또한 솔직히 말해보면,

누군가를 어떤 식으로든 칭찬해 주는 것도 편치 않게 된 사회를 탓하기도 했습니다.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싶어도 칭찬을 못해주는 현실이 된 문화도 많아졌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일화로 생각해봅니다.

거창한 외교부 수장들이 모여서 외교를 어떻게 하느냐도 국가 간의 중요한 과제겠지만,

국민 VS 국민이 인정과 배려로 서로를 표현하면,

엄청난 외교 시너지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을요.


내가 받아 온 교육을 탓하기 전에,

상대를 적대적으로 보고, 나의 싫음이 타당했던 마음을요.

서로가 대인배임을 운운하지 않는,

진심 어린 인정과 배려로 서로를 표현해주는 문화가 좀만 더 번진다면,

이 해로운 분노와 갈등은 조금씩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결국 뻔한 결론 같아도, 그 뻔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저부터 반성합니다.


< 오늘의 속삭임>


인간은 서로에게 상냥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존엄한 것 아닐까.


                  '최소한의 선의'   -문유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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