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다 보면 흑백논리로 판단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존재한다.
죽느냐 사느냐,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을 때가 있고
이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는 게 좋은지, 지금 끊어버리는 게 좋은지 알 수 없는 때가 있고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행동을 취하는 게 좋은지, 나중에 할 후회가 두려워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좋은 건지는 사람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세상에 절대적인 법칙 따위는 없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은 "절대적인 법칙은 없다"는 것뿐이다.
“선과 악, 행과 불행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불확실하며 또 서로 뒤얽혀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관계에 의해 갖가지로 나눠질 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건에 좌우되는 경우가 실로 많습니다. 따라서 삶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어떤 절대적이고 확고한 선택 기준을 찾으려는 사람은 아무리 평생 동안 궁리하고 모색해도 결국 그것을 찾지 못한 채 죽어버릴 것입니다." (새뮤얼 존슨 - <라셀라스>)
하지만, 요즘 와서 다소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
어느 상황에서나 들어맞는 '항상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성립할 수 있는 '비교적 절대적인' 기준은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흔들리지 않기 위해, 또는 소모하는 정신력과 체력을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준은 정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미처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과 정해지지 않은 기준들이 머릿속을 마구 돌아다니며 끝없는 혼란 속으로 나를 몰고 간다.
우리의 정체성은 결코 고정될 수 없다. 의식의 부정적 본성에 따라 우리가 발을 디디는 모든 지반은 흔들린다. 무게를 실으려 시도하는 순간 바닥은 힘없이 꺼져 들어간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고정된 바탕도 없다는 것, 우리 스스로 그 어떤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와 같은 자유에 대한 감각이 불안이다. (장 폴 사르트르 - <존재와 무>)
나의 글쓰기 행위는 내 안의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정제하고,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하기 위한 과정이다.
글을 쓰면서,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를 마친 뒤 나는 조금이나마 내가 쓴 글과 가까운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은 너무나 흐릿하고 알아보기 힘들어, 어떤 색깔로 확실히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포기해 버릴 수는 없다.
종착역에 다다르는 길이 멀고 험하다해서, 출발 지점에서 발도 때지 못한 채 끝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도착 지점과 가까운 곳까지는 가보고 포기를 해야 남는 게 있을 테니 말이다.
"내 정체성은 어떤 색깔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영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정체성은 이런 색깔에 가까워요."라고는 말할 수 있는 때가 언젠가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