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는 관점을 바꾸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이야기, <레이디 맥베스>
변곡점들 두 번째 이야기이자, 영화를 보는 시야에 변화를 준 두 번째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바로 <레이디 맥베스>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 <맥베스>에 나오는 '맥베스 부인'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총 2번 보았는데,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 받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던, 신기한 경험을 한 바 있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영화의 자극성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고, 플롯도 '왜 이렇게 흘러가야 하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 와서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나는 이 영화를 '적당히 자극적인 오락영화'정도로 기대했던 것 같다. 당연히 영화 속에 숨겨진 주제의식을 느낄 여유가 없었고, 애초에 그런 걸 찾을 노력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레이디 맥베스>는 그 당시 나에게 '자극적이고 이상한 영화'라는 인상을 남겼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는 '계급', '복수'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어보았다. 19세기 영국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 비해 열등했다. 애정 없는 결혼을 한 아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딱히 내세울 장점도 없는 그녀는 가정 내 구성원들에게 무시받는 처지에 놓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바로, '스스로가 악인이 되어 그들을 단죄하겠다'라고.
줄거리
영화의 배경은 19세기 영국이다. 젊은 여성 캐서린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저택에 고립되어 있다. 폭압적인 시아버지의 감시 아래 갇혀 지내는 답답한 생활에 지친 캐서린은 마구간의 일꾼 세바스찬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 욕망은 곧 통제되지 않는 폭력으로 변해,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방해하는 존재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간다.
첫 번째 단죄 대상은 가정 내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시아버지다. (어떻게 죽였는지 내용 넣기) 캐서린이 시아버지를 독살한 사실을 알게 된 하녀는 충격을 받아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자신을 구속하는 존재가 사라지자 캐서린은 하인 세바스찬과 마음껏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죽음으로 찾아온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가정 내에서 그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남편이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다. 캐서린은 세바스찬과 공모해 남편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세바스찬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빠지게 되고, 그의 내면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악행을 저지르는 캐서린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싹트게 된다.
이제는 정말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 캐서린 앞에 남편의 사생아와 그 아이의 할머니가 찾아온다. 덜컥 세바스찬의 아이까지 임신해 버린 캐서린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러던 중 아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 세바스찬이 아이를 구출해 오지만, 할머니는 세바스찬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러자 캐서린은 세바스찬을 부추겨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캐서린은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사이, 세바스찬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살해한다.
아이가 죽자 캐서린이 제일 먼저 범인으로 지목된다. 사람을 죽이는 데 두 번이나 가담한 세바스찬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캐서린은 위기에 몰린다. 이때 캐서린은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안 나와 세바스찬을 범인으로 고발한다. 안나는 시아버지가 죽은 뒤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둘은 범인으로 지목되어 캐서린 대신 끌려가게 된다.
마침내 캐서린은 홀로 살아남았다. 이제는 저택에서 그녀의 자유를 위협하는 그 어떤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짓는 표정에서는 후련함, 행복함이 아닌 쓸쓸함과 허무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페미니즘 영화로서의 해석
무시받는 처지에 놓였던 그녀는 가정 내의 권력자인 남성들을 하나씩 제거하여 반전을 일으키고자 한다. 그 당시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녀가 한 행동은 ‘최선의 복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복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그녀는 빼앗겼던 그녀의 자유를 완전히 되찾아온다.
하지만 복수를 이룬 캐서린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다. 욕망이라는 동력은 싸워야 할 대상이나 장애물이 있어야 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싸워야 할 억압도, 그녀를 가로막는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이라는 동력을 잃어버린 그녀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 껍데기가 되어버렸다.
이 영화는 억압받고 있는 여성 계층이 남성 계층에게 복수하는 페미니즘 영화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억눌린 여성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극단적인 성분리주의자들에게 경고도 함께 담고 있다.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들을 전부 몰아내고, 홀로 남은 여성은 자유와 권력을 얻었다. 하지만, 그 자유와 권력을 행사할 어떠한 대상도 캐서린에겐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뱃속에 있는 세바스찬의 아이는 계속해서 그녀가 행한 악행을 상기시키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결국 그녀는 무엇을 위해 싸워왔던 것일까?
결국 <레이디 맥베스>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을 품고 있다. 자유는 싸워서 쟁취해야 할 가치이지만, 자유를 쟁취해 낸 자는 '그 자유를 가지고 살아낼 것인가'라는 고뇌를 항상 안고 있어야 한다. 캐서린은 억압을 뒤엎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인간성을 잃어버렸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전부 끊어진 채 혼자가 되었다. 그녀의 세상에게 복수를 하며 승리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잃으며 패배했다. 영화는 이 모순적인 결말을 통해, 단지 권력을 뒤바꾸고 자유를 얻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씁쓸한 진실을 알려준다.
<하얀 리본>이 영화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사유의 즐거움을 가르쳐준 영화였다면, <레이디 맥베스>는 어떤 시야로 작품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이야기가 주는 감흥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였다. 처음 볼 때는 흐릿했던 인물들의 정서가, 두 번째로 볼 때는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 영화는 이런 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다. 첫 번째로, 시놉시스만 보고 이 영화를 지나쳤던 분들.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봤는데 불쾌감만 느끼신 분들. 이 글을 읽고 나서 영화를 다시 한번 보면,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 T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