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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변곡점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3 기억을 다루는 방식의 변곡, <라쇼몽>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by 조종인
당신은 스스로를 어디까지 신뢰하는가?

'메타인지'라는 말이 있다. 남의 지시 이전에 스스로 자기 생각·평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흔히 이 메타인지를, 자신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대하는지 그 척도로 사용하곤 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메타인지는 높은가? 낮은가? 당신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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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스로를 평가할 때 바탕이 되는 건 '기억'이다. 그런데 그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화되거나, 마음대로 왜곡될 수 있다.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해서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그 평가 또한 불완전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과연 스스로를 온전히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라쇼몽>과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는 이 질문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내놓는 작품들이다.



<라쇼몽>

gpYADlpkoFTChBLjIrZU7hxDKz1.jpg (이미지 출처 : TMDB)


故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은 폭우가 쏟아지는 폐허 속 라쇼몽 문 아래에서 한 나무꾼, 한 승려, 한 평민이 모여 지난 사건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중심은 한 무사가 숲에서 살해되고, 그의 아내는 강간을 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은 무사(죽었기에 영매를 통해 말함), 그의 아내, 산적(범인), 그리고 사건 현장을 목격한 나무꾼까지 네 가지로 제시되지만, 모두의 말이 서로 다르고, 심지어는 자신이 살인을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어 혼란을 준다.


각 인물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사건을 기억하고 진실을 구성한다. 산적은 자신이 여인을 사랑해서 무사와 정정당당히 싸워 죽였다고 말하고, 여인은 자신이 남편의 경멸에 못 이겨 칼로 그를 찔렀다고 말한다. 무사는 아내의 배신에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고 주장하고, 나무꾼은 처음엔 진실을 숨기지만 나중에야 사건의 추악한 실상을 고백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9791130622491.jpg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한 중년 남성, 토니 웹스터의 1인칭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토니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자신의 청춘 시절 역시 평이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한 친구의 유산으로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으로 돈을 남겼다는 사실을 계기로, 그는 잊고 지냈던 베로니카, 그리고 베로니카와 사귀었던 절친 애드리언의 자살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기억을 되짚는 과정에서 토니는 자신이 생각해왔던 과거가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음을 점점 깨닫는다. 애드리언의 자살 뒤에는 자신이 쓴 한 통의 편지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그리고 베로니카와 그녀의 가족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드러나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마음대로 그 기억을 왜곡시켜 왔는지를 실감한다.



우리는 지금껏 얼마나 스스로의 기억을 왜곡해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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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해부학과 생리학의 측면에선 스스로를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언어의 재능을 타고났고 또 지각 능력이 있으며 성찰할 줄 아는 존재로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데 필요한 자질을 모두 결여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사람은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하나의 독특한 현상이다. (칼 구스타프 융,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우리가 박스를 창고에 보관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박스를 있는 그대로 창고에 저장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 박스에 여러가지 포장지를 씌우기도 한다. 포장지가 씌워진 상태로 저장된 박스는, 오랜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이고 겉면이 변색되는 등 큰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포장지와 박스가 들러붙어 그 둘을 쉽게 분리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기억은 어떤 사건을 우리 뇌 속에 보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행위는 앞서 말한 박스를 창고에 보관하는 것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박스'는 기억, '창고'는 뇌, '포장지'는 사건을 겪을 당시 우리가 느낀 감정, 우리가 사건이 대해 행한 가치 판단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앞서 언급한 칼 구스타프 융의 서술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억 또한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왜곡되기 쉽다. 이는 <라쇼몽>에서 사람들의 증언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토니의 기억이 실제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억하는 것보다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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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록이 만나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中)

우리는 기억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이상할 정도의 확신을 가질 때가 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라쇼몽>처럼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거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시간이 흐른 뒤에야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쉽사리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첫번째로, 기록을 세세하게 남겨둘 필요가 있다.

앞서 나온 대로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록이 만나 확신이 빚어지는 것이라면 — 기억의 부정확함은 일단 내버려두고 — 그 불충분한 기록을 충분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일기를 쓰든, 사고가 있었을 때마다 그 때 감정이나 상황을 기록해 두는 등의 행위를 한다면, 그와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다시 그 기록을 참고하면서 기억을 비교적 정확하게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로, 기억에 확신을 가지지 않고 끝까지 의심하는 것이다.

어떤 기억이 "무조건 옳았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기억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고, 사건에 대한 자신과 타인의 기록도 살펴보고, 스스로도 계속해서 '이 기억이 맞나?'라고 반문해보는 방법이다. 다만, 이 방법에는 큰 단점이 있다. 끊임없이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는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고, 결국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현기증' 상태로 우리를 내몰 수 있다. 그러니 본인 재량껏 사용해야할 방법이다.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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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기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우리가 잊은 것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건 아닐까? 설령 그것이 기술적으로 더 어렵거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해도?
(줄리언 반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中)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기억을 바로 잡는 일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의심하고, 충분한 기록을 남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잊고 지나친 것들이 언제,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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