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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쑤 Mar 26. 2016

산티아고 도착 5일 전의 내 마음

2015년 10월 14일, 스페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어떠한 수정도 하지 않은

그때의 그 일기.


아침부터 좋았다. 직접 데운 따뜻한 우유와 어제 갓 산 빵, 그리고 요플레까지. 아침이 완벽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다. 남은 것은 가방에 싸들고 길을 나섰다. 산을 넘기 전에도 10킬로를 넘게 걸었다. 그리고 오늘 넘어야 할 산 앞에 다다랐을 때, 산을 넘기 위해,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카페에서 카페콘레체를 마셨다. 그리고 시작된 등산. 길이 단조롭지 않다 보니 도착시간은 평지를 걸을 때보다 훨씬 늦지만 걸을 때 쾌감이 있다. 옛날에는 몰랐던 그런 쾌감. 숨이 헉헉 차오르는 데도 내가 걸어온 길을 위에서 내려다볼 때의 그 짜릿함. 이렇게 날이 좋은 날 아름다운 풍경이 선사하는 경이로움까지. 오늘 걸으며 본 풍경은 정말 최고였다. 스위스만큼 산이 높은 것도 아니고, 온 산이 가을빛으로 물든 것도 아니었지만, 중간중간 산을 끼고 흐르는 구름과 소들이 방울을 딸랑 거리며 풀을 뜯는 소리, 초록빛 숲만으로 충분했다. 오르막길을 걷다가 힘이 들면 잠깐 내가 걸어온 길을 내다보았다. 이 풍경만으로도 내가 이 길을 오를 이유는 충분했다.

오늘 누가 말했다. 누군가가 가장 짧은 시간 내에 행복해지는 방법이 뭐냐고 묻는다면 30일 동안 이 길을 걸으라고 말해 줄 거라고. 그리고 오늘 알베르게에서 찾은 일기 역시 다른 표현을 사용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왜 행복한지 모르겠다. 걸으면서 나에 대해 많은 고찰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물집과 무거운 짐 때문에 몸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행복하다. 굳이 이유를 붙이고 싶지도 않고, 뭐라고 정의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행복하다. 그리고 이유 없는 이 행복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늘 산을 넘느라 피곤해서 씻은 후 잠깐 침낭에 들어가 있었다. 이제야 이렇게 걷는다는 것, 이런 내 기분, 걸으면서 내가 느끼는 이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고 있었다. 로레타에게서 온 페북 메시지 하나하나, 길을 걸으며 주운 밤을 까먹는 그 순간, 추운 아침 입김을 불며 걷다가 어느새 떠오른 해를 보며 눈 부셔하는 그 순간들, 밤에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는 아름다운 별들. 이 모든 것이 내 행복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다. 행복하면서 동시에 슬프다. 순간순간이 흘러가는 게 느껴져서 안타깝다. 아침 해가 뜨고 밤이 올 때까지, 천천히 느릿느릿 걸으며 하루를 다 느낄 수 있고, 정말 '시간'이란 것 자체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오늘 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게 느껴지니, 잡고 싶어 진다. 그래도 행복하다. 그거면 됐다. 나는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지금 그 행복을 느끼고 있다. 아름답다. 1주 차, 2주 차에 느꼈던 많은 고뇌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한국에 있는 인연들과 쓰잘데기 없는 고민들,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며 걸었던 그 시간들은 이상하게도 다 지나갔다. 육체적인 고통도 이제 초월한 것 같다. 아, 나는 정말 행복하다. 내가 걸을 수 있는 만큼 더 이 길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너무 행복해서 시간 가는 것이 두렵다.


얼마나 행복했으면 저렇게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적었을까. 태어나서 저렇게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해 본 적도, 일기에 저렇게 많이 써본 적이 없는데. 슬픈 건 어느새 이때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이란 감정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다는 점.


일기를 적어두길 정말 잘했다. 나는 언제고 내 일기를 꺼내 읽어보고, 지금과는 다른 장소의, 다른 내가 느꼈던 다른 내 감정들을 되새길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종종 내가 쓴 일기들을 부분부분 공유 해보려고 한다. 지금의 내가 새로 쓴 내용들보다는 비교적 간단하겠지만,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그래서 더 솔직한 글들이니까. 나도 잊지 않으려, 정말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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