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쑤 Mar 18. 2016

로맨티스트 에릭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6



한 달 남짓의 긴 시간, 하루의 30킬로가량을 매일 매일 걷다 보면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정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남녀 사이에 로맨스가 싹트기도 한다.


에릭은 브라질에서 온 30대 남자였다.

큰 키만큼 보폭도 커서, 에릭이 두 걸음을 움직이는 동안 나는 세 걸음을 움직여야 했다. 웃음이 많고, 능청스럽고, 그리고 정말 마음이 착했던 친구다. 사람들을 만나면 정말 크게, 꼬옥 안아줘서 일명 '빅허그 맨'으로 불렸다.


그런 에릭을 만나 함께 걷던 날, 에릭이 나에게 들려줬던 로맨틱한 이야기가 있다.







에릭은 순례길을 두 번째 걷는 거라고 했다. 처음 걸었을 때가 20대 초중반쯤이었다고 했나. 그때 길을 걷다가 마주친 여자가 있었단다. 걷다가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할 법도 한데, 이 여자와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고 한다.

둘은 계속 함께 걷는 동안 서로 인사도, 이름 조차 묻지 않은 채 서로 눈만 보며 걸었다. 누가 넘어질 것 같으면 아무 말 없이 잡아주고, 끌어주던 그 둘은 오후가 돼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을이 보이자 아무 말 없이 서로 끌어안았단다. 한참을 포옹한 뒤에서야 서로 웃으며 통성명을 했다고 했다.

이런 특별한 경험에, 상대방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릭은 좀 더 남달랐다. 이 여자와의 인연을 정말 운명에 맡겨보고 싶었단다.

다음 날, 여자는 일정 때문에 출발해야 했고, 에릭은 친구를 기다리느라 마을에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고 헤어지기로 결정했단다. 우리가 인연이면 다시 길 위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며.

이 얘기를 듣고 나는 에릭을 타박했다. 그 여자를 많이 좋아한 게 맞냐며 말이다. 내 말에 에릭은 때때로 만남을 더욱더 특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답했던 에릭도, 며칠이 지나자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고 했다.

길을 걸으며 온종일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날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여자의 이름을 말하며 아냐고 묻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 여자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는데 옆에 놓인 가로수에 눈에 띄게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피곤해서 그걸 가지러 가기도 귀찮을 법했지만, 그냥 왠지 그걸 봐야만 할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길에서 잠깐 벗어나 나무 위에 놓인 쪽지를 집어 든 에릭은 깜짝 정말 놀랐단다. 놀랍게도 그건, 에릭이 그리워하던 그 여자가 에릭에게 쓴 편지였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쪽지를 발견하던 에릭은 점점 더 속도를 냈고, 마침내 쪽지를 본 지 3일째 되는 날 그때 그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둘은 순례길이 끝날 때까지 함께 걸었고, 그 이후에도 여행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끝까지 함께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여자는 헝가리 출신이었고, 에릭은 브라질로 돌아가야 했다.




에릭은 이제 브라질에서 만난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다시 그 여자를 만나고 싶지는 않냐는 나의 말에, 그는 이제 이 기억을 추억으로만 간직한 채 산다고 했다.


그 예쁜 기억들이 추억으로 밖에 남을 수 없는 걸까. 현재가 될 수는 없나.


나는 추억을 좇고 산다. 옛날 기억들을 떠올리는 걸로도 모자라, 가끔은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추억을 다시 현재로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때때로 추억은 추억으로 놔둘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나도 안다. 나도 에릭처럼 좀 더 자라면 그럴 수 있을까.


많은 것들이 이미 지난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기에는 아직은 내가 조금 벅차다.

매거진의 이전글 곁에 없었어도 함께였던 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