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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쑤 Mar 26. 2016

물집이 가득했던 두 발

2015년 10월 8일의 일기, 스페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고서 2주 반쯤 되던 10월 8일, 이 날은 평소보다 더 많이 걷는 날이었다.

무려 38km. 전 날 길을 잃어서 45km를 걸은 걸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걸은 날이다. 그런데 이 날 최고로 늦잠을 잤었다. 중간에 숙소가 추워서 한 번 깨고 다시 눈을 감았더니 7시 반. 걸어야 할 길이 까마득한데 이렇게나 게으름을 부렸었다니.



왼쪽 발바닥에 있는 물집, 그리고 새끼발가락 전체에 생긴 물집이 말을 안 듣는다. 새끼발가락 전체가 그냥 흐물거린다. 그냥 내 신체가 아닌 것 같은 촉감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다. 오늘따라 걷는데 매우 욱신거린다. 내가 빠르게 걷는 걸 보고 다른 순례자들이 '너 오늘 날아다닌다'며 웃는다. 오늘 일정이 빠듯하기도 했지만, 사실 멈추면 아프니까 이렇게 걷는 거다.

이렇게 고통에 무뎌질 때가 있다. 처음 순례길을 시작하고 5일 차가 되기 전에는 걷는 게 참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걷는다는 것 자체에는 무뎌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집이 생긴 이후로는 첫 한 걸음을 떼는 게 참 힘든데, 걷다 보면 이 고통에 무뎌진다. 특히나 빨리 걸으면 더 그러하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면 다시 고통이 엄습한다. 앞으로 나가야 할 땐, 이 모든 걸 감내해야 한다. 고통에 무뎌진다는 게 좀 슬픈 일일 수 있으나, 그로 인해 내가 추진력을 얻는다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무뎌지고 익숙해질 수 있을 만큼 사실 큰 고통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기를 읽다 보니 이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발가락마다 물집이 생긴 게 신기해서 웃기지만 사진까지 남겨놨었다. 어쨌든 미친 듯이 속도를 내서 걸어 순례길을 걷다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대도시인 '레온'에 도착했었다. 도시가 눈 앞에 다가온 것 같은데도 한참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던 대도시.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희망고문'. 바로 눈 앞에 도시를 두고 '조금만 더 걸으면 되겠지' 하고 스스로 다독이며 한참을 더 걸었다.


레온이 보이기 시작할 때. 표지판에도 적혀있는 'LEON'



어찌 됐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레온.


레온에서 바늘을 구해 발에 생긴 물집을 다 터뜨렸었다. 날 힘들게 하는 것들이지만 이 물집들이 왠지 싫지 않았다. 아픔을 느끼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아프든 간에, 내일 나는 다시 걸을 것이고 걷다 보면 또다시 이 고통도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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